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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mish Jun 03. 2020

구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

감질맛나는 책갈피 :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회사에서 어떤 사건이나 이슈를 해결할 때 해당 이슈가 발발한 근원적인 문제부터 파악해나가는 것이 해결하는데 유리하다. 그리고 근원적인 해결을 하지 못하고 이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개발제약, 마케팅 전략, 혹은 사내 정치적인 압력 등-를 파악하면, 제시해야할 해결 방법은 꽤 많이 추려진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일을 대응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문제해결의 무기라고도 생각한 적이 있다. 전체의 시스템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각종 자기계발서에서도 많이 언급한다. 헌데 이 책은 그것이 우리가 ‘구조주의’에 길들여진 사고방식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속한 회사, 정치, 나라의 시스템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 시스템을 에워싸는 현재의 이데올로기, 구조주의의 형태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이해가 갈 때까지 이 책을 필사하기로 맘 먹었다.

그 중 소개해드리고 싶은 내용들을 일부 발췌하여 보여드리려고 한다. 

리뷰라면 리뷰라고 할 수 있고, 요약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감질맛 나게 이 책을 소개하여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고싶어지거나, 귀중한 인사이트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구조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적으로 표현해야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의 견해를 이용하지 않고는 이에 대한 견해를 성찰하지 못한다. 


언젠가 구조주의 특유의 용어 (시스템, 차이, 기호, 효과 등)를 말하는 것에 다들 질리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구조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였던 시대’의 종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히스토리를 파악해가며 이슈를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고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함에도, 언젠가 이러한 사상에 질리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 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개성이 풍부한 사람이며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낀다고 믿지만 그 의식활동의 전체 과정에는 어떤 심적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눈을 계속 돌리고 있는 억압의 편견이 늘 자리잡고 있습니다. “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가 매일, 끊임없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 모국어에 어떤 단어가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는 그 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경험, 사고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인이나 미국인 모두 아픈 곳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통증의 장소를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통증의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각각의 언어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어권에서는 힘든 일을 할 때 ‘무거운 짐을 등에 멘다 carry a burden on one’s back’라고 말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등뼈가 부러진다 break one’s back’이라고 말한다. 등이라는 것은 노동과 관련이 있는 신체 일부라는 것이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나타낼 때에도 우리가 '어깨가 결린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등에 대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신체적 통증의 표현이 아니다.


"1960년대 초반에 미국 대통령이었던 J.F 케네디는 등에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주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녔습니다. 쿠바 위기 당시 하이애니스포트에서 요트에서 내려 지팡이에 매달리듯 걸어가던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단지 ‘아프겠구나’ 정도로 생각되던 그 영상을 당시 미국 국민은 ‘등이 굽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견디고 있는 대통령’이라는 강렬한 메세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깊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신체적 경험 또는 같은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생리적 현상까지 언어의 틀을 통과하면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영화의 예에서 보듯이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도 비슷한 구조의 견해를 읽었다. 농업혁명은 인간이 작물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작물이 인간을 길들임으로써 사냥에 적합하던 인간을 하루의 반을 작물을 돌보도록 하고 이전보다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였다. 한 곳에 정착하여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얻어낸 것이 마치 인간이 진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별적 인간은 수렵채집을 하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밀과 쌀이 인간을 길들인 것이다.


텍스트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인간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텍스트가 조종하는 컨트롤러를 보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의지가 솟아나는 것은 이해하겠다만, 나도 모르게 행동하던 것들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좀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범지구적인 세계가 오기 전 한 문화권에서 평생 살아야 했던 인간들이 온갖 세계여행으로 다문화를 접하면서 관점의 폭이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제서야 이것은 ‘문화’이지,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 중심적이던 인간들(특히 유럽제국)은 처음에, 다른 문화권을 하대하였다. 내가 있는 세상이 정답이었으니까. 


“인간주의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차례로 ‘보다 좋은것’, ‘보다 진실한 것’이 연속적으로 현현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지금 여기, 내가 모든 기준이기 때문에 그것이 최고 도달점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전제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정의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들이 농업,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고 수렵채집인의 삶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개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지식의 범주가 다른 것일뿐. 수렵채집인의 뇌가 현대인의 뇌보다 컸다는 사실은 그들이 결코 현대인보다 지능이 떨어지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각각의 사회집단은 각각 자기들의 실리적 관심을 기초로 해서 세계를 잘라냅니다. 어업을 주로 하는 부족은 수생식물에 대한 어휘가 풍부하고 수렵민족은 들짐승의 생테에 관한 어휘가 풍부합니다. 

어떤 영역에 대해 개념이나 어휘가 풍부하다는 것은 그 집단이 그 영역에 대해 깊고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명인’과 ‘미개인’은 그 관심을 갖는 방법이 다를 뿐, ‘문명인’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 다는 것이 ‘미개인’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계는 사고의 대상, 즉 최소한 다양한 욕구를 채우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


혹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우리는 나, 혹은 우리에 속하는 집단이 아닌 반대편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쟁이나 내란, 권력 투쟁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을 가져서는 안된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미국사람이 보는 풍경과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보는 풍경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 상식은 사실 매우 ‘젊은 상식’입니다. 그런 사람 또는 그런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국민의 다수를 넘어 ‘상식’이 된 것은 불과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


이 책은 구조주의자들의 풍부한 견해를 간단히 들려주는 책이다. 따라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이 각자 하고싶은 말을 들려주는 것일 뿐, 무조건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구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면서, 내가 어떤 구조에 길들여져 있는지 알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기를 바란다.


"현재 우리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하는 선과 악의 구분이나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은 그다지 보편적인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결코 자기의 의식을 확대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 시대, 우리가 사는 곳, 우리가 속한 사회집단이 지닌 고유한 민족지적 편견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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