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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mish Aug 23. 2020

경계를 지어야만 살아가는 사람들

감질맛 나는 책갈피 : <사람, 장소, 환대> (1)


우선 읽는 내내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약속한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사회, 공간, 자격, 범주, 신분 등 들었을 때 바로바로 떠오르는 사물이 아닌 개념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주 늘어놓는다. 덕분에 그 개념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려가며 읽다보면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그렇게 음미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책.


" 소외된 인간이란 쇠약하고 가난한, 그렇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악이 되고 적으로 변한 인간이다" 


사람들은 본질에 대해서 묻곤 한다.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도 변하지 않는 성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고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그 범위들을 따라가다보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장소에 대한, 그리고 결국은 그를 대하는 마음가짐, 즉 환대에 대한 범위이다.


"노예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는 것,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얼굴 유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노예의 얼굴을 고려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


노예를 앞에 두고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 입거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행동들 역시 이러한 믿음에서 온다. 노예는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나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얼굴을 가질 수 없고, 온전한 이름을 가질 수 없으며,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노예에게 온전한 이름이 없다는 것 -그의 이름에는 혈통과 출신지를 표시하는 부분, family name이 없다.-은 그가 태생적으로 소외된 존재임을 알린다. 그는 출생에서 기인하는 권리들을 주장할 수 없는데, 그러한 주장을 들어주고 인정해줄 친족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올랜도 패터슨은 채무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 자가 제3자, 즉 친족에게 자기 아이를 맡길 수 있으면 그 아이는 자유인으로 남게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러한 제3자가 없어서 그가 자기 손으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아이도 따라서 노예가 된다. 아이를 부양하는 데 든 비용은 모두 주인에게서 나온 것을 간주되며, 아이가 주인에게 진 빚으로 계산되는 까닭이다. 


즉 노예의 신분이 세습되는 것은 노예가 친족이 없는 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노예로 태어난 자는 태생적 권리가 없기에 그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


사형수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설명할 수 있는 예시로 사용될 수 있다. 사형수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그가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건지, 혹은 그로부터 추방된 존재인지도. 그래서 역설적이어 보이지만 사형수에게 잔인한 고통을 주는 것이 아직은 그를 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빠르게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사회계약론의 전통에서 사형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계약이 계약 당사자들의 주체성을 전제한다고 할 때, 주체의 소멸을 계약의 내용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주장처럼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계약이 계약으로서 효력을 갖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 계약 역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직관은 사형이 사회계약의 틀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이루어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사형수라 명명하는 것은 사형수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성원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는 상태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사회라는 범위 안에 소속되지 못한 존재로 선을 그어놓는 것이다. 너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어쩌면 사람이 아닌 물건의 지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혹은 도살장의 가축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가 사람으로서 지녔던 광휘는 온전히 이 공동체에서 빌려온 것이기에,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그를 도살장의 가축처럼 두려움 없이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준다."




"전통 사회에서 사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성원권 박탈 의례를 구성하였다. 가설무대처럼 광장 한가운데 높게 세워진 처형대,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 사형수에 대한 공개적인 고문과 모욕은 사형의 의례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달리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는 사형의 집행이 아무런 극적 장치 없이,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처형대는 공공장소에서 소수의 관계자들만이 접근 가능한 격리된 공간으로 옮겨졌으며, 보는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려는 목적으로 세심하게 고안되었던 다양한 처형 기술들은 사형수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신속하게 죽음을 가져오는 새로운 기술들로 대체되었다. "


사형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부터 사형수의 존재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 범죄자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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