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책을 쓰고 싶단 발작버튼이 눌린 최초의 인터뷰이

최효안 에세이 <내 안의 발작버튼>

by 최효안

나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프로페셔널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기자들 사이 오래된 농담이 있다. "기사만 안 쓰면 기자란 직업은 정말 좋다" 기사 쓰는 일의 고통이 그만큼 압도적이라는 얘기.


나의 경우는 좀 지나쳐서 기사의 완성도에 대한 강박이 있다. 그러나 '완성도 강박증'은 데일리 기자, 즉 매일매일 보도를 해야 하는 지상파 방송기자에게는 꼭 필요한 동시에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형벌이다.


제한된 시간 안에, 무조건 기사 데드라인을 엄수해서, 바로 그 시점에 최고의 기사를 써내야 하는 것이, 지상파 방송 데일리 보도 부문에 속한 기지들의 숙명. '완성도 강박증'이 없으면, 함량 미달의 기사가 나오기 쉽다. 반면, '완성도 강박증'이 너무 심하면. 기사를 써놓고도 늘 미진하다는 자책에 빠진다.


누구보다 기자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는 사실 기사 말고 호흡이 더 긴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그 시대의 기록인 기사를 잘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찼다. 그러나 '기사나 잘 쓰자'라는 나의 신념을 깬 인터뷰이가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노라노.


그녀를 만나면서, '이 사람은 한 편의 기사로는 안 되겠다. 그녀의 서사를 책으로 남겨야겠구나' 처음으로 내 안의 집필 발작버튼이 눌렸다.


SBS 보도본부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어느 날, 나는 노라노라는 아주 특이한 이름의 패션디자이너를 인터뷰하게 된다. 사실 나는 1928년생인 그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가 80대 시절.


모르는 분을 인터뷰하니 일단 그녀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조사했다.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아했다. 도무지 한 사람이 이룩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경이적인 서사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녀의 삶이 성공으로만 점철된 삶이었다면 나는 굳이 평전까지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녀의 삶은 대부분이 고난과 역경으로 채워졌다.


일제강점기가 절정이던 시절에 태어나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위기, 이혼 후 혈혈단신으로 미국 유학 등을 거치며 그녀는 얼마나 힘든 상황을 무수히 겪었겠는가.


가부장적이고 전통적 가치가 완강했던 시절에 이혼녀로 패션이라는 전대미문의 분야를 개척하며 그녀는 도무지 이해 안 되고 가혹한 숱한 상황에 직면한다. 거기서 극심한 분노를 느끼지만, 동시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에는 반드시 분노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라고 역설한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난을 기필코 뒤집겠다! "바로 그 지점이 나를 매혹시켰다.


일단 그녀는 한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두 번째로 탄 여성이었고(첫 번째는 성악가 김자경), 미국에서 정식으로 패션디자인을 대학에서 배우고 귀국, 한국 전쟁 직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공식 패션쇼를 열면서, 한국 패션디자이너 1호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선구자다.


정신대 징집을 피하려 서둔 첫 결혼을 이혼으로 마무리하고, 헨리크 입센의 희곡 <노라의 집>에 나오는 여주인공 노라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이름을 노명자에서 노라노로 바꾸는데, 거기에는 노라처럼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 후 그녀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명동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의상실을 열어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은막의 최고 스타들은 물론 육영수 등 영부인 옷도 만드는 당대 최고의 패션 거장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패션 혁신가'라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입는 기성복을 최초로 한국에 도입한 사람이 바로 노라노다.


그녀는 맞춤 의상실을 오래 운영하며 한국 여성의 표준사이즈를 축적했고, 여성들이 보다 편하게 옷을 누리기 위해선 기성복 도입이 필수라고 생각해 1966년 국내 최초로 여성 기성복을 출시한다.


더 놀라운 업적은 그 이후인데, 국내에서 기성복을 도입해 성공한 이후 1980년대에는 미국 뉴욕 고급 패션시장에 진출해 경이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점이다. 지금도 수출 1천만 불은 쉽지 않은데, 그녀는 이미 1980년대 한국산 실크로 만든 고급 여성복으로 미국에 진출해 수년간 수출 1천만 불을 넘겼다.


이토록 놀라운 업적을 남긴 '패션 혁신가'를 '패션에 미친 자'인 나조차도 몰랐다니. 이후 나는 노라노를 10년 넘게 취재하며, 그녀 일대기를 저널리스트적인 시선에서 평전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는 잊힌 '노라노'라는 불굴의 인물을 오랜 기간 취재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에.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노라노에 대한 나의 평전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마음산책)이다. 이 책에는 앞에서 정말이지 간략하게 언급한 그녀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삶이 펼쳐진다. 적절한 시점에 제대로 눌린 나의 집필 발작버튼에 감사를 표하며, 또 이 버튼이 눌릴만한 놀라운 인터뷰이를 만나길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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