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안 에세이 <내 안의 발작버튼>
인류사의 무수히 많은 최고 반열의 지성인들이 다룬 주제가 바로 권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욕망과 필요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 욕망이 충족되면 고통도, 만족도 아닌 권태(boredom) 만이 남는다고 보았다. 즉 고통과 권태가 인생의 양 극단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이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권태를 단순한 ‘심심함’이 아니라 존재의 위기나 자기부정으로 보았다. “자신이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절망적 거절”로서의 권태라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 이후 활동한 사회심리학자 프롬은, 산업 사회나 현대 사회에서 권태가 단순한 일과 여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고통(“지옥에 견줄 수 있는 tortures”)이라고 진단했다. 즉 권태는 “존재의 무의미, 생산성 상실, 공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처럼 매사 의미를 따지고 의미가 중요한 '의미주의자'들에게는 권태가 정말 무서운 존재다. 어떤 일이나 사안에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는 순간, 정말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강박적으로 자주 '내 안의 발작버튼'이 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 이대로 가다간 권태를 느낄 수 있어!'라고 나의 무의식이 소리치고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것이다.
일단 발작버튼이 눌리면 놀라운 에너지가 생성되니까, 버튼이 꽉 눌린 상태에서는 권태를 느낄 겨를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함부로 자주 발작버튼을 누르면 안 된다.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발작 버튼이 자주 눌리면 결국은 제 풀에 지쳐 나자빠지고, 그 끝에는 권태가 꽈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다. '매번 이러는 것은 의미도 없고 뭐 하는 거지?' 이런 감정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권태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 '발작 버튼'을 누르다가 다시 '권태 상태'에 빠지는 자기모순. 이럴 때는 좀 멍을 때리는 것이 가장 좋다. 자꾸 의미에 집착하려는 나를 무념무상의 상태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잡념이 많은 이 에게느 쉽지는 않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 '권태'와 '발작'과 '무념'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다.
권태는 사실 의미의 사후(死後)다. 의미주의자는 살아있기 위해 의미가 필요하고, 그래서 가장 먼저 의미의 죽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발작 버튼은 도망이 아니라, 의미를 되찾기 위한 급발진이다. 그리고 무념은 도피가 아니라 정비다.
나는 이미 태어났고, 여하튼 살아야 한다. 그것도 최대한 정성껏.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최효안 예술 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