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낭만적 공간이 아닌, 치열한 생존 현장 '남극'

-최효안의 <압도적 한 문장>

by 최효안

최효안



2026.03.02

56440



[arte] 최효안의 압도적 한 문장

홍종원, <400일간의 남극 체류기>, 눈빛, 2007



한국인, 아니 대부분 세계인에게 남극은 ‘머나먼 그곳’이다. 전 세계를 ‘지구촌’이라는 정겨운 말로 부른 지도 오래지만, 여전히 남극은 범접하기 어려운 동토(凍土)의 땅. 미지의 세계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때로는 기록을 남기게 한다. 그래서 남극을 탐험한 이들이 남긴 기록문학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불세출의 고전으로 살아남았다.

그 가운데 내가 뽑는 최고의 작품은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의 <남극: 어니스트 섀클턴의 마지막 탐험기(South: The Story of Shackleton’s Last Expedition)>(1914~1917).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극 대륙 횡단이라는 야심으로 출항했으나 원정 도중 배를 잃었고, 탐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목표를 바꾸었다. ‘횡단’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얼음 위에서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항해를 감행해 결국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모두를 귀환시켰다. 이 책은 그 놀라운 여정을 담았다.

이 책의 위대한 지점은 너무나 많지만,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3가지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기록했다는 것’, ‘자연을 배경이 아닌 행위자로 기록했다는 것’. 그리고 ‘결과가 아닌 과정을 끝까지 기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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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홍종원 교수



어니스트 섀클턴의 책이 출간된 지 한 세기가 지나서 한국에도 남극을 제대로 탐험한 기록문학이 등장했다. <400일간의 남극 체류기>는 저자 홍종원이 남극세종과학기지에 의무 대원(의사)으로 400일간 머문 뒤 발간한 책이다. 남극을 직접 경험한 한국인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펴낸 기록문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다. 이 책은 무려 463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대한민국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사계절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노동, 생활의 리듬이 촘촘히 담겨 있다. 그리고 어니스트 섀클턴의 책과 기본 뼈대가 일치한다.



100년의 시차가 있지만, 남극에서의 삶은 언제 어떤 위험이 일어날지 모른다. 저자는 남극에서의 일견 사소해 보이나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던 에피소드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고, ‘자연을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서술’하며. 그리고 남극에서의 ‘체류 전 과정을 현미경처럼 기록’한다. 이 기록의 태도는 섀클턴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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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홍종원 교수



이 책은 맨 첫 장부터 솔직하기 이를 데 없다. 남극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얼떨결에 준비 없이 내린 우리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얀 눈은 고사하고 흙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바람을 마주보고 격납고로 걸어가는데 입과 눈으로 흙가루가 들어왔다. 침을 뱉었다.
‘아뿔싸....’ 바람이 세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다.
뱉은 침이 강풍에 날아가지 못하고 얼굴에 달라붙었다.
“젠장...”이렇게 남극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홍종원, <400일간의 남극 체류기> 中에서



저자는 외과(성형외과) 의사답게 남극과 남극세종과학기지 대원들의 일상을 마치 메스로 살을 깔끔하게 가르듯 일체 군더더기 없이 기록한다. 책에 불필요한 미사여구 따위는 없다. 건조하면서도 위트가 내재 된 그의 글은 술술 잘 읽힌다. 가독성이 높은 이유는 분명하다. 이 책은 자기 현시욕(顯示欲)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간절히 소망하는 남극에 의무 대원(의사)으로 온 저자는 이과생답게 남극과 그곳의 인간군상의 모습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데, 책을 쓴 이유와 의사가 된 이유도 동일하다. 남극을 접한 귀한 경험을 널리 나누고 싶다는 것.




의사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남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직업이 어떤 것일까 고민 중에 내린 결론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 내가 얼마나 남극에 가고 싶어 했는지 주변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느 순간, 당연히 남극으로 가야만 하는 것으로 내 마음속에서 정해져 버린 것이다.

-홍종원, <400일간의 남극 체류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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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홍종원 교수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남극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며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일깨워준다. 남극 하면 모두 눈과 얼음을 떠올리지만 실은 ‘춥고 사나운 바람’이 무섭다는 사실, 그리고 자외선이 어마어마해서 일광화상을 각별하게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 펭귄 어미들의 새끼에 대한 사랑이 지극정성이라는 사실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남극에 관한 팩트로 가득하다. 남극은 ‘막연한 추상의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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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홍종원 교수



특히 조리 담당을 돕는 역할을 했던 저자는 남극에서 뜻밖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깨닫는다. 잠이 부족하던 인턴 시절 아침밥 보단 잠을 더 자기를 원했던 저자는, 아침마다 따뜻한 밥을 차려 어떻게든 먹이려던 어머니와 늘 다툰 기억을 떠올린다.




자고로 세종기지에 있는 일 년 남짓한 동안 식은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뜨거워서 식혀 먹었을망정, 이곳에서 매끼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어머니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됐다.
(남극에서) 김치통에 한참 김치를 옮겨 담고 나면 손에서는 항상 마늘 냄새가 났다. 손을 한참 씻어도 한동안은 마늘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음식에 들어가서 특유의 향을 내는 그런 마늘 냄새가 아니라 뭔가 눅눅한 냄새였다. 가만히 음미해 보니 어머니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홍종원, <400일간의 남극 체류기> 中에서



이 책은 출간된 지 내년이면 20주년을 맞는다. 지난 20년간 한국에선 이 책보다 더 생생하고 세밀하게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일상을 기록한 단행본은 나오지 않았다. 문학의 중요한 덕목이 ‘시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남극을 낭만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으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기록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한다.







사진. © 홍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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