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낭만을 무료로 찾아드립니다.
팬데믹 이후 벌써 세 번째 뉴욕행이었다. 이번 휴가의 주목적은 태어난 지 150일 된 조카를 보러 가는 것이었기에,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물론, 퇴근하자마자 바로 공항에 가느라 직통열차를 30초 남기고 타버리는 쫄깃한 순간도 있었다.)
할 것도, 볼 것도 많은 뉴욕이지만, 최근 뉴욕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1,400원에 육박하는 달러 환율을 차치하고서라도, 15~20%의 Tip과 Tax까지 더해지면 한 끼 식사 값이 무섭다. 코리안타운에서 유명한 북창동 순두부집(일명 BCD)에서 순두부찌개 3개를 주문했더니 10만 원이 넘었다.(정말 맛있기는 하다.) 매번 2.9달러(약 4천 원)를 내야 하는 전철은 환승이 되지 않아, 웬만한 거리는 절로 걷게 된다.
하지만 알뜰하게 뉴욕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특히, 여름에는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뉴욕의 공원에 가야 한다. 'Concerts in the park'와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을 야외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매년 여름마다 공원에서 무료 콘서트를 연다. 이번 여름, 브라이언파크(Bryant park)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며 영화를 보았고, 센트럴파크(Central park)에서는 잔디밭에 앉아 필하모닉 연주로 귀호강을 했다.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뉴욕에 여의도 크기만 한 '센트럴 파크'가 생길 당시, 주변의 반대에 설계자 옴스테드가 반박한 말이다. 프레드릭로 옴스테드는 센트럴 파크를 설계하며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시간 탈출'이라는 철학을 담았다고 한다. 공원 부지 개발 이슈는 계속되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복잡한 도시 뉴욕에, 공원은 오늘도 숨을 불어넣고 있다.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공원으로 '브라이언 파크'가 있다. 뉴욕에 갈 때마다 들리는, 최애 장소이기도 하다. 5번가와 타임스퀘어 근처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좋고, 높게 자라난 나무들이 공원을 둘러싸 거대한 도심 속 아담한 숲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공원의 상징인 초록색 철제 의자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어 쉬어갈 수도 있다. 공원에 들어서면 보이는 분수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지기도 한다는데, 나는 매번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매년 80여 개국 정도 나라의 동전이 분수에서 수거된다고 한다.)
브라이언파크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대표적으로 여름밤 야외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무비나잇이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무료 요가 클래스가 열린다. 저글링 클래스나 체스/보드게임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겨울에는 커다란 스케이트장과 크리스마스 마켓이 설치되어 겨울 낭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액티비티 일정이나 참여 신청은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매해 여름, 매주 월요일 밤 8시에 브라이언 파크에서는 올드무비를 상영해 준다. 오프닝 데이에 갔더니, 상영작이 무려 인생영화 중 하나인 ‘포레스트 검프’였다. 영화 시작은 8시부터였지만, 2-3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자리 잡는 사람들도 있고, 공원에 비치된 초록 의자에 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친구의 추천대로 커다란 피자와 맥주를 사서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자리를 골랐다.
오후 8시 정각. 공원 앞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영화가 시작되었고, 스크린 뒤로 새파랗던 하늘은 황금빛 해 질 녘을 지나 어둑한 밤이 되었다. 건물들에도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영화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몇 번이나 본 영화임에도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빠져들었고, 감동의 눈물까지 찔끔 났다.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 같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검프의 모습과, 사랑으로 아들을 믿어줬던 어머니, 그리고 검프의 우직한 사랑까지. 영화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원에 있던 모두가 박수갈채를 치는데, 그 순간 또한 영화의 일부였다.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I’m not a smart man, but I know what love is."
"It’s my time. Don’t be afraid, sweetheart. Death is just a part of life. It’s something we’re all destined to do. I didn’t know it, but I was destined to be your mama. I did the best I could. Well, I happened to believe you make your own destiny."
- Forrest Gump(1994)-
브라이언 파크 바로 옆에는 대리석으로 빛나는 도서관이 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캘리가 결혼하려던 곳이기도 하며, 영화 '투모로우'에서 주인공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장소다. 세계 5대 도서관이자, 1911년 문을 연 뉴욕 공공도서관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대리석 건물이었다고 한다. 보자르 건축 양식을 택한 도서관 내부와 천장 벽화가 특히 아름답다.
'로즈홀'에 가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에서 조용히 집중하고 있는 뉴요커들도 만날 수 있다. 삶의 가까운 거리에 공원과 도서관이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큰 낭만이 어디 있을까 싶다.
브라이언파크와 도서관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공원 아래에는 약 320만 여권의 책이 들어갈 만큼 거대한 뉴욕 공공도서관의 저장실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뉴욕 공공도서관의 기념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조카의 애착인형과 그림책도 이곳에서 샀다!)
뉴욕의 대표적인 공원은 당연 '센트럴파크'다. 복잡한 도시 뉴욕에 산소를 불어넣는 허파 같은 역할을 한다. 센트럴파크의 크기는 여의도와 맞먹는다고 하며, 독립국가인 모나코보다도 큰 면적이다. 센트럴파크 부지는 처음에는 돌밭, 습지, 진흙밭으로 이루어져 이민자들이 주로 살았다고 한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소음, 위생시설 등으로 인해 공원의 필요성을 느낀 뉴욕시에서 땅을 구입하게 되었고, 1853년 공원 개설이 허가되었다.
공원의 나이가 150살을 넘은 만큼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가득하며, 중심부로 가면 뉴욕의 마천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정말 거대한 공원이 맞다. 공원 내로 마차가 다니기도 하고, 자전거 전용도로도 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는 뉴요커들도 많다. 센트럴파크가 만들어질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를 기증하여, 실제로 호수에서 곤돌라를 탈 수도 있다.
센트럴파크의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인 '베네스타 테라스'에 가면 아름다운 분수대와 광장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분수에는 'Angels of the waters'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매년 여름이면 뉴욕 센트럴파크의 드넓은 잔디공원에서 뉴욕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 열린다. 뉴욕 필하모닉은 1965년부터 여름마다 무료 공연을 펼쳐왔는데, 지금은 센트럴파크의 커다란 연례행사가 되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공연과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도 이루어진다.)
도심 속 탁 트인 잔디밭에서 필하모닉 공연을 볼 수 있다니, 뉴욕에 가기 전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최애 영화 <어거스트 러시>의 마지막 공연 장면도 바로 뉴욕 필하모닉 인 센트럴파크였다. 공연 당일만큼은 동생도 칼퇴를 하기로 하였고, 조카를 돌봐주고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오후 8시 공연 시간에 맞춰서 전철을 탔더니, 사람들 대부분 센트럴파크를 가는 듯, 양손 가득 피크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공원 내 공연 장소인 'The great Lawn'에 도착했더니, 이미 각양각색의 크기와 모양의 블랭킷과 돗자리들이 잔디밭을 뒤덮었다. 누워있는 사람부터, 와인과 스낵을 먹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뉴요커들이 이미 공원의 날씨와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자리를 찾아 한참 헤매고 있는데, 공연이 시작되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까 봐, 당황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더니, 감사하게도 근처에 있던 뉴요커들이 본인들의 블랭킷을 함께 쓰자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상상 속에는 챙겨간 예쁜 블랭킷을 펼치고 편안한 자세로 공연을 즐기는 것이었는데, 부모님과 맞대어 앉으며 가져간 돗자리는 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정말 좋았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울려 퍼지는 음악도 아름다웠고, 선선한 날씨도 한 몫했다. 인터미션을 지나며 점점 하늘이 어둑해지는데, 그럴수록 무대와 도시는 더욱 빛이 났다. 정자세로 공연을 보던 부모님께서 힘들어하셔서 중간에 나왔지만, 충분한 힐링이 되었다. 필하모닉 공연의 마지막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니, 체력이 된다면 끝까지 보기를 권한다.
센트럴파크 어디서든 피크닉을 할 수 있지만, 특히 피크닉 장소로 유명한 곳들이 있다. 'Sheep Meadow'는 공원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드넓은 잔디밭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실제로 1930년대 양을 방목했던 목초지였다고 한다.
뉴욕에서 유명한 에싸베이글과 파니니, Ralph's coffe에서 커피를 픽업하여 가족과 이곳에 피크닉을 간 적에 있는데, 모처럼 편히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조카의 난생 첫 공원 나들이도 센트럴파크였다.)
센트럴파크의 피크닉 명소 5 곳
센트럴파크 인근에는 일명 뮤지엄 마일(Museum Mile)로 불리는 곳이 있다. 맨해튼 5번가 82번 스트리트부터 104번 스트리트까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9개의 미술관이 이어지는 거리를 ‘뮤지엄 마일’이라고 한다. 명품거리와 부촌이 있는 이 일대에는, 재벌들이 자신의 저택을 기증해 만든 박물관들도 있다. 매년 6월에는 뮤지엄마일 축제가 열리는데 근방의 미술관과 박물관 모두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올해는 6월 18일이었다.) 뮤지엄마일 축제가 아니더라도 각 미술관이나 박물관 별로 무료입장이 가능한 요일과 시간을 확인하여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다.
뉴욕에 가기 전, 그라운드 시소에서 열리고 있는 '이경준 뉴욕 사진전'에 다녀왔다. 사진작가가 뉴욕에 살며 느낀 뉴욕의 삶을 기록했는데, 그중 마지막 섹션이 'Rest Stop', 공원의 기록이었다. 바쁘게 사는 뉴요커들이지만, 그들은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랑과 낭만을 찾는다. 나 또한 이번 뉴욕 여행에서, 오히려 여유롭게 즐겼던 일상들이 오래도록 여운에 남았다.
ps. 이러한 낭만과 휴식은 다시 서울로 이어진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주말마다 야외 책마당을 운영하며 평일엔 달빛 요가 클래스를 연다. 인왕산과 경복궁을 배경으로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기도 했다. 뉴욕의 야경과는 조금 다르지만, 광화문 주민에게 서울의 여름밤도 여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