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봄을 맞이하는 자세

광화문에도 봄은 옵니다.

by 효효

April showers bring May floewers.


유난한 날씨가 이어지는 2025년 봄이다. 만개한 벚꽃 사이로 느닷없는 눈보라가 몰아치기도 하고, 따뜻한 볕 사이로 들어오는 시린 바람에 옷깃을 부여잡기도 했다. 그럼에도 겨우내 웅크렸던 나무들이 기지개를 켜며 삐죽삐죽 뻗어낸 잔가지 끝에, 푸릇한 잎들이 하늘을 향해 돋아나기 시작했다.


화상영어를 하던 중 뉴욕의 봄 날씨가 어떻냐는 질문에, 선생님이 'April showers bring May floewers.' 라며 웃어 보였다. 실제로 4월의 뉴욕은 생각보다 춥고 비도 많이 왔다. 아침마다 허드슨강을 끼고 가볍게 동네를 뛰는데, 한 번은 촉촉이 내리는 비가 다정한 토닥거림으로 느껴졌다. 비가 좀 오면 어떠랴, 그 또한 봄을 맞이하는 자세다.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 물으면 '봄'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기도 하고, '바라본다.'의 '봄'이 되는 중의적인 뜻도 좋다. 게다가 '봄'이라는 글자는 화분에서 피어나는 식물의 모습과도 닮았다. 여름과 겨울에 치여 점점 사라지는 계절이라지만, 아무리 짧은 봄이라도, 봄은 '봄'이고 싶다.



1. 할머니의 89번째 봄


봄맞이 시작엔 항상 할머니 생신이 있다. 가족 생일이 3분기에 몰려있는데, 할머니 덕에 봄마다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다. 작년에는 광화문에 위치한 곤드레밥집에서 모두가 한데 모여 저녁을 먹었다. 조금은 특별한 저녁이었다. 유채꽃을 한아름 들고 인사하러 가던 길 위로 노란 봄꽃 향과 다정함이 공존했다.


유채꽃향을 맡을 때면, 춥지만 따뜻했던 제주의 봄이 떠오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우봉을 올라, 노란빛이 만발한 유채꽃밭에 다다랐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유채꽃 사이로 너도나도 봄향을 잔뜩 맡았다.


싱그러운 봄꽃을 닮아 여전히 소녀 같은 할머니는 올해 89세를 맞이하셨다. 지금도 노인대학을 다니며 배움의 길을 걸을 만큼 열정이 가득한 우리 할머니는, 여행을 가거나 새로움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올해 생신엔 뮤지컬 <알라딘>을 보여 드렸는데, 누구보다 집중하며 즐겁게 보셨다.


할머니는 상주에서 태어나, 아버지들끼리 자식을 맺어주자던 연으로 외할아버지와 혼인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당시 깨어있으셨던 분으로 할머니를 남동생과 함께 공부시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동생과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다니던 할머니였다. 여전히 고운 모습의 할머니지만, 긴 세월 풍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고난과 역경이 있을 때마다 묵묵히 끈기와 현명함으로 모든 시간을 살아내셨다. 그렇기에 때로 할머니의 한마디가 묵직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항상 있는 그대로를 믿고 사랑해 주시는 할머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은 모두를 지키는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증손주 돌잔치에서 할머니의 따뜻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가 큰 울림이 되었다. "우리 예쁜 유안이 잘 크거라 건강하게. 신실하게 자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계셔서, 따뜻한 봄날 4대가 함께하는 여행을 언젠가 가고 싶다.


2. 광화문의 봄


광화문 계절의 바로미터는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이다. 올해 봄은 보랏빛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허수경 시인의 <라일락> 구절이 걸렸다. 여러모로 떠들썩했던 광화문이지만, 이곳에도 결국, 봄이 찾아왔다.


회사 앞에는 사시사철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이 하나 있다. 청각장애가 있는 아주머니가 계신 곳으로, 종종 들리곤 하는데, 이번엔 뜨끈한 군고구마를 하나 함께 다정히 내어주셨다. 꽃샘추위에 딱 알맞은 온도였다. 자리에 두고 매일 보는 화분도 많이 자랐다. 지나 보면 한 뼘 자라 있는 계절이 봄이다.


최근 남산원 아이들과 함께 경복궁으로 봄 나들이를 다녀왔다. 팬데믹 이후 오랜만의 경복궁 나들이였다. 다 같이 한복을 갈아입고 투어를 할 예정이었는데, 때아닌 우박과 눈보라가 이는 것이 아닌가. 모처럼만의 봄나들이었을 텐데, 오히려 변화무쌍한 날씨에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들 눈높이에 제격인 경복궁 나들이가 되었다. 짝꿍을 지어 다니면서 아이와 부쩍 친해졌는데, 점심을 먹으며 아이들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에 꽤나 놀란 듯했다. 많은 단체를 거쳐갔겠지만 여전히 다정함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헤어짐을 인사하는 친구들을 배웅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3. 뉴욕의 봄


뉴욕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뉴욕의 봄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자주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린 조카가 있다 보니 가족의 도움이 필요해 고모인 나도 가게 되었다.(한 아이를 키우는데 정말 온마을이 필요하다.)


고모할머니에게는 오랜만의 뉴욕이었다. 뷰가 좋은 할머니의 호텔이었지만, 뉴욕의 스카이라인에서는 계절을 느끼기 어려웠다. 하루는 러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식빵과 꽃 한 단을 사고, 고모할머니가 계신 호텔에 꽂아두었다. 생각보다 추운 봄날씨였지만, 노란 봄이 호텔방으로도 스며들었다.


할머니, 엄마와 함께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911 메모리얼 파크를 방문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게, 학원 끝나고 집에 갔을 때 TV에 방영되던 모습이 영화가 아닌, 뉴스였다는 것이다. 2001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비행기 테러에 의해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미국은 이 공격으로 약 3,000여 명의 목숨을 잃었고,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두 개의 거대한 Memorial Pool을 만들어 주변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Memorial pool은 희생자들의 눈물을 기억하는 곳으로 뉴욕에서 유일하게 한없이 밑을 향해 묵념할 수 있는 곳이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테러로 인해 흘린 유가족들과 미국인의 눈물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정사각형 구멍은 누군가에겐 소중한 가족, 친구, 동료였을 테러 희생자들의 빈자리를 상징하며, 여기로 물이 빠지도록 설계를 한 것은 이 구멍으로 아무리 많은 물을 쏟아부어도 구멍을 모두 채울 순 없듯이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 채울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나무위키)


그리고 그 옆에 Survival Tree가 있었다. 911 테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무라고 했다. 당시 나무껍질이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 후 섬세한 복원작업을 통해 다시 가지가 살아나고 2010년 이곳으로 옮긴 이후 매년 봄마다 꽃망울을 피워내며 회복의 상징으로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하얗게 만개한 나무 앞에서 다시 한번 위로를 느꼈다. 살아남은 나무는 생명력을 키워 또다시 꽃을 피워냈고, 올해 봄에도 추운 날씨를 뚫고 봄을 맞이했다. 그렇게 슬픔을 딛고 삶은 지속된다.


당신의 봄은 다정한가요?


하품의 법칙이 있다. 하품을 하면, 그 옆사람에게도 하품이 옮는 것이다. 가깝다고 생각되거나, 관계가 깊은 사람일수록 전염도는 커진다. 춘곤증이 찾아오는 계절에, 하품마저 다정하다. 나는 그래서 한결같은 다정함이 참 좋았다.


"효효랑 이야기하다 보면, 조금은 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네가 살아온 삶의 방향이나 생각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게 자연스럽게 너의 주변에도 묻게 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토양과 햇볕에서 무럭무럭 자라며, 결실 맺은 열매를 주변과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떠나는 겨울이 아쉬워 찾아오는 꽃샘추위처럼, 미련과 설렘이 교차하는 봄날엔 역시, 다정함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다면, 나는 아낌없이 '다정'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H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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