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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Sep 20. 2019

화요

아침 출근길에 냉장고를 열어 고이 보관중이던 화요를 꺼냈습니다. 냉장고에서 두어날 남짓 잠자고 있던 놈이었죠. 아는 분이 출장길에 저한테 주려고 사온 것을 그동안 마시지 않고 그냥 모시고 있었습니다. 냉장고 왼쪽 문 중간 제일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화요는 냉장고를 열때마다 언제쯤 자기를 불러주나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실 독주를 잘 마시지 못합니다. 소주, 백주, 보드카, 위스키, 꼬냑, 데킬라 등등 이런 고알콜성 주류는 가급적 마시지 않고 그저 맥주, 포도주, 막걸리 같은 것을 즐기는, 말하자면 진정은 애주가는 못되는 편입니다. 그러니 41도나 되는 화요를 제가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할 수 밖에요. 그렇다고 선물로 받은 술을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출근길의 술병, 이것 참 예삿일이 아닙니다. 한글로 화요라고 병에 써 있어도 생김새가 한눈에 술병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술병을 들고 맨해튼을 활보할 정도의 용기는 저에게 없습니다. 부엌 한켠에 모아놓은 종이 백을 뒤지다가 마침 판도라를 발견했습니다. 조금 작지않을까 싶었는데 병을 그 속에 넣어보니 병 목부위가 살짝 나오는 것이 안성마춤이었습니다. 높이는 딱 좋은데 폭이 넓어서 들고 가는 와중에 왔다리 갔다리 하겠는데 하는 순간 종이백 중간에 리본을 만들 수 있는 끈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 끈으로 병의 목주위를 묶었습니다. 제대로입니다. 가만히 쳐다보니 미소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소주잔으로 4명이서 나눠마시면 고작해야 인당 두잔입니다.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없어져 버릴텐데 굳이 이런 수고를 하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그리 힘들지 않은 수고로 친구들이 맛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일입니다. 아마도 누가 시켜서 아침에 화요 병들고 출근하시오 라고 했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안들고 나갔을 것입니다. 혹시나 두고 나올까봐 자리를 옮길 때마다 눈치를 보면서 들고 다녔습니다. 판도라에 넣은 후에는 아예 핸드폰 바로 옆에 두었습니다. 다함께 캬~ 하며 마시는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가 술병을 들고 출근하는 이유는 오늘 저녁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연찮은 인연으로 매주 한차례씩 점심을 같이 먹으며 정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점심만 먹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가끔 이렇게 저녁을 먹기도 합니다. 이 저녁 자리에 각자 출장길에 사온 술이나 저처럼 선물로 받은 술을 가지고 나옵니다. 우리는 매번 일찍 먹고 일찍 헤어지자고 다짐합니다.그러나 그게 늘상 그렇듯이 시작은 우리 뜻이되 마침은 하늘의 뜻이어서 언제 어떻게 마무리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노래방 절대 가지말자고 아마 초장에 다들 비장하게 각오를 다질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신의 물방울이 어떤 조화를 일으킬지 말입니다.


판도라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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