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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Dec 01. 2022

진목에서

뒷동산에 올랐다. 내 얼굴에 남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동산의 소나무는 굵어졌고 언덕은 낮아졌다. 초등학교 무렵 열심히 다녔던 교회만 그때 그자리 그 모습 그대로인데 문득 그 너머 언덕베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놀랍기만 하다. 저멀리 보이는 바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산, 저 산들로 하여 바다는 큰 호수처럼 보이는데 또 바다에 시선이 닿기전의 들판도 넉넉히 넓다. 이 멋진 풍경이 왜 그시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형님, 동생같은 조카와 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떠드는 소리에 옆방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형수님의 경고가 서너번째인데 우리는 그저 모르쇠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안주는 간간하게 간이 알맞은 시골산 깻잎무침, 매운 고추가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콩나물 아구찜. 쌓이는 빈병, 오르는 취기로 우리는 춘추와 로마시대를 논하고 산업혁명과 비트코인을 논하고 다시 사람의 도리를 논하고 인문학적 소양이 매우 부족한 정치인을 성토했다.


다음날,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인 시각에 잠을 깼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 싫어 조용히 물을 한대접 들이키고는 집을 나섰다. 새벽의 한기가 훅 몰려온다. 적막강산이 시골을 묘사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 우리 마을은 새로 생긴 도로를 달리는 차들로 전혀 적막하지 않다. 게다가 오렌지색 가로등이 골목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어서 이전의 시골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시골의 새벽은 적막하다. 양털 구름이 흩어져 있는 사이로 하현달이 제법 훤하고, 별도 유난히 빛난다.


땅은 그대로인데 그 땅위의 논은 공장으로 바뀌었고, 농원으로 바뀌었고, 4차선 도로로 바뀌었다. 저 4차선 국도 너머에는 어릴때 멱을 감던 강이 있었다. 강은 꽤 넓어서 장마 후에 헤엄쳐 건너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동무들과 나는 서로 지기 싫어 무섭게 흘러가는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아무리 헤엄을 잘 쳐도 센 물살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에 뛰어들때는 항상 건너편 목적지보다 한참 위쪽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강으로 가는 길목에는 주인의 눈을 피해 서리를 하던 포도밭이 있었지 아마. 철조망 밑으로 기어들어간 다음 포도송이를 딸 때의 그 조마조마함이란… 그 강도, 포도밭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대항 축구시합에서 가구 수로도 아이들 수로도 제일 적었던 우리 마을은 거의 언제나 우승후보였다. 이웃 마을들은 어떻게든 우리 마을을 이겨보려했지만 승리는 늘 우리들 몫. 다음에는 꼭 이긴다며 복수를 다짐하던 그 이웃마을들도 지금은 적막에 쌓여있다. 동네와 동네 사이는 추수가 끝난 들판. 저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툭 튀어나온다면 저도 놀라고 나도 놀라겠지만 나는 걸었다. 하지만 마을길은 길고양이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참이나 멀어보이던 그 마을이 몇발자국에 닿을 곳이라니.


해장은 형님이 시골장에서 사온 물메기탕. 큰 머리에 큰 입, 미끈한 몸을 가진 이 생선은 아마도 바다에서 못난이 대회가 열리면 족히 TOP 3에 들만하다. 모르긴 해도 가장 큰 경쟁자는 아귀가 아닐까. 생김새와는 달리 기름기가 전혀없는 탕은 담백하기가 이를 데 없고, 푹 익혀진 생선살은 입안에 넣어면 씹을 필요도 없이 가루가 되어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어가는데, 그래서 입안 화상을 조심해야 한다. 지난밤의 소주는 이 물메기탕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형수님은 두그룻을 느끈히 비운 나를 보고 물메기탕이 생각나면 언제든지 오란다. 그 말에 이제야말로 내가 고향을 떠나는구나 싶고 그렇게 '진목'은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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