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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hyun Hwang Jan 13. 2017

브루클린 브릿지

브루클린 브릿지는 비오는 밤이 제격이다. 빗물에 젖어드는 맨하탄 야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만약 당신이 맨하탄쪽 교각 근처에 서 있다면 발밑을 한번 더 쳐다볼 일이다. 그 교각은 모래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외모로는 금문교에 미치지 못하고 기능에서는 죠지워싱턴 브릿지에 미치지 못하며 길이에서도 탑텐에 들지 못하는, 그러나 이 다리도 한때는 세계 최고인 시절이 있었다.


문명의 진보는 상상과 도전의 산물이다. 미국은 그런 상상과 도전이 어우러진 진보의 상징 같은 나라이다.  2003년 9월 4일 BBC가 제작,방송한 ‘ 산업세계의 일곱가지 기적(7 Wonders of the Industrial World)’에 미국과 관련된 것이 4개(브루클린 브릿지,후버 댐,대륙횡단 철도,파나마 운하)나 선정된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감탄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 전 세계의 수많은 교량을 두고BBC는 왜 하필 이 브루클린 브릿지를 7대 기적에 포함시킨 것일까?


맨하탄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차량용 왕복 6차선과 도로 한 가운데, 차량이 다니는 길보다 더 높게 만들어진 인도를 통해 일반인들이 걸어서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그래서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드는 차량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속도로 바다와 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어른 걸음 걸이로 왕복 한시간 정도면 충분하니 시차에 시달리는 여행객이나 피로에 찌든 뉴요커들이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도 제격이다.


1870년 1월 3일 착공하여 1883년 5월 24일 개통한 이다리는 총 연장 1824M, 폭 25.9M의 현수교이다. 그런데 이런 이력을 보면서 문득 드는 의문 하나, 과연 이 다리의 폭은 어떻게 결정되었을까?존 로블링이 이 다리 설계를 시작한 1867년은  미국에 아직 차량이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답은 그가 브루클린 브릿지를 설계하기 전에 만든 다른 다리에 있다.


존 로블링은 독일 출신 이민자로 현수교 설계 시공 전문가였다.지금은 존 로블링 브릿지로 명명된 신시내티 시내, 오하이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그가 설계,시공한 것이다.1867년, 이 다리가 개통되었을 때 말 1마리가 끄는 마차1대의 통행료가15센트, 말 3마리가 끄는 마차는 25센트, 행인 한사람의 통행료는1센트 였다고 한다. 도로의 폭은 마차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도 마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브루클린 브릿지가 그 어떤 다리보다 위대한 이유는 그 나이나 길이나 풍광이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기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리라는 점이다. 공사가 시작된 1870년 , 그 때는 타워크레인도,레미콘도,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그 어떤 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가 병인양요,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는 바로 그 무렵, 미국에서는 오로지 상상력에 의존하여1800M가 넘는 다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희생도 만만치 않았는데 설계자인 존 로블링 자신을 포함해 모두21명이 이 다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건축학이나 수학, 그 어느것도 배운 적이 없는 주부가 이 다리의 현장 감독이었다면 믿어지는가.  처음 다리를 설계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존 로블링(John Augustus Roebling)이었다. 그는 다리 건설을 위해 부두를 조사하던 중부두로 들어오던 페리의 뱃머리에 발이 짓이겨 지는 부상을 당한다.이 부상에 따른 파상풍으로  설계도만 남긴채 그는 다리 건설의 총 책임을 아들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Roebling)에게 넘기고 눈을 감는다.그런데 워싱턴도 공사 개시 얼마 후,  교각 공사를 위한 잠수에서 감압증에 걸려 반신 불수가 되어 버린다.  그도 이제는 직접 현장을 감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준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 에밀리였다. 그녀는 이 후11년 동안 충실히 워싱턴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다리 완공을 지켜보게 된다.  


대부분의 대형 공사가 그렇듯이 이 다리도 처음 계획한 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나간 것은 아니다.많은 고비 중에서도 아마 가장 큰 고비는 워싱턴이 맨하탄쪽 교각작업을 할 때 내린 의사결정일 것이다. 브루클린쪽 교각은 약 13.5m 지점에서 기반암을 만나 교각 작업을 할 수 있었지만 맨하탄 쪽은 30m이상을 파고 들어가도 기반암을 만날 수 없었다. 워싱턴은 인부들에게 강 바닥에서 나온 개펄 견본을 가져오게 한다. 세심한 분석결과 이 개펄이 수백만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기반암이 아닌 개펄 위에 그대로 교각을 짓게 한 것이다.  맨하탄 쪽 교각은 아직도 그 개펄위에 그대로 서 있다.


애시당초 이 다리는 필요한 것보다 6배정도 강하게 설계되었다.그런데 강철 케이블 생산을 맡고 있던 로이드 하이(LloydHaigh)가 원가 절감을 위해 강도를 약하게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운 강철 케이블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워싱턴은 이 사실을 최대한 비밀에 부치고 기존 케이블에250가닥의 강철을 보강하는 것으로 공사를 밀어붙인다. 이 설계 변경으로 다리의 강도는 좀 약해졌지만 여전히 필요강도 대비 4배나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납품 비리의 주인공 로이드 하이는 이후 감옥으로 가야만 했다.


전대미문의 이 다리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은 이 다리가 언젠가는 무너지거나 부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들은 다리를 이용하는 대신 페리를 타고 맨하탄과 브루클린을 오가고 있었다.  1884년 5월 17일 서커스 사업자 바넘(Barnum)은 그의 서커스단과 코끼리 21마리를 이끌고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걷어내는데 일조하였다. 132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  12만 5천대의 차량이 통행하고 있으니 로블링 부자가 경이롭기만 하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최초로 건넌 사람은 미국 대통령도, 뉴욕 시장도 아닌 워싱턴 로블링의 아내 에밀리였다.  아직도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 정도로 여겨지던 시대에, 그것도 거칠기 짝이 없는 건설 현장에서11년이나 꿋꿋이 남편을 도와 이 다리가 개통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에밀리에게 그 런 예우도 부족했으리라. 오늘날수많은 여성이 브루클린 브릿지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다리에 남아 있는 에밀리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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