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통근시간에는 책을 꺼내 들고 있기도 민폐일만큼 사람이 들어차, 핸드폰으로 하는 것은 결국 인스타그램으로 종결되고는 했다. 뿐만인가, 주문한 커피를 기다릴 때도 자기 전에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릴 때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어보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보다 보면 맛있는 것 먹은 이야기, 좋은 곳에 간 이야기, 무엇을 멋들어지게 성공시킨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눈이 즐겁다가도, 솔직히 순간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못해본 것들을 내 동기는, 내 또래의 다른 누군가는, 내 꿈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해지는 것이다.
집이 서울 밖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차를 사게 됐다. 고작 1년 운전을 쉬었을 뿐인데, 처음에는 어쩐지 겁도 나서 음악 감상은 꿈도 못 꾼 채 막히면 막히는 대로 고스란히 그 시간을 정적 속에 긴장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매일 가는 길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가는 둥 마는 둥 서 있는 고속도로에서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딱히 음악이 준비되지도 않았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나 들어볼까 해서 틀었는데, 시간대가 어중간해서 그런지 신나는 노래는 나오지 않고 올드팝이 몇 곡 나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옛 다방 BGM이었을 법 한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듣고 있었는데, 사연은 우리 엄마 나이 정도 되신 노 중년 부인이 남편과 처음 사귀게 된 날을 회고하는 내용이었다.
첫 데이트에 그 남자는 고급 승용차를 몰고 집 앞에 나타났단다. 그렇게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인천 앞바다에서 조개구이도 먹고 바다 구경도 하고 신나게 놀다가 음악다방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가 보게 되셨단다. 촛불이 조명을 대신한 그 지하 다방에 디제이가 틀어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들이 어찌나 낭만적으로 느껴지던지, 갓 스물이 넘었던 본인으로서는 그렇게나 멋진 날을 보낸 적이 없으셨단다.
한참 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려 밖으로 나왔더니 하필(?!)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남자는 ‘이걸 어쩌죠. 비가 너무 오고 밤길 운전은 좀 위험해서 오늘은 못 돌아가겠는데요. 잠시 저쪽에 가서 비나 피하죠.’라는 비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은 뻔한 대사로, 그날부터 1일이라는 박력을 보여주셨단다.
그리고는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몰고 나온 고급 승용차가 사실은 사장님 차였으며, 당시 남편은 운전기사였다는 지금은 무언가 식상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 그러나 이미 두 분은 사랑에 빠졌고, 돈이 없으면 어떠랴 알콩달콩 결혼 생활에는 두 딸이 생겼고, 그 딸들도 이제 결혼을 했단다. 그리고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때에는 꼭 그 일이 생각이 나신다는 아주머니.
아저씨는 이미 먼저 하늘로 가신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주머니는 아직도 그 풋풋하게 속아 넘어갔던 그 날이 어제처럼 생생해서 웃음이 나신단다. 그래서 그때 그 음악다방에서 들었던 곡을 신청하셨다.
그 촌스러운 옛날 팝송을 듣고 있자니 괜히 울컥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던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라디오 사연을 듣는 시간에는 있다.
분명 두세 명이 좋아요를 눌렀을까 말까 한 시시한 것들로 사연을 보내고, 그 청취자와 나 사이에, 마치 공통의 친구 같은 디제이의 목소리가 마음을 담아 읽어준다. 시선을 끌기 위해 보낸 사연들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담담하게 정성을 담아 보낸 사연들이다. 기쁨과 슬픔과 지루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공유한다. '별세계에 있는 것 같은 그들'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인스타그램만 보다가, '별 다를 것 없는 우리들'이어도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는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소중한 건 사소하고, 눈을 돌리기만 하면 행복은 언제나 옆에 있다는 진부한 이야기. 그 진부한 진리가 어찌나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지. 그렇게 차에서 내리면 왠지 조금 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근 10년 만에 듣게 된 라디오에는 잊고 있던 매력이 넘쳐, 나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