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텍스타일 프린트 제조 생산 규모와 근대 역사가 글로벌한 입지를 가지고 탄탄히 구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독립 텍스타일 프린트 디자이너는 그토록 전무하다시피 할까, 항상 의문이었다. 런던의 프린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도, 덴마크 프린트 디자이너도, 한국이 굴지의 프린트 텍스타일 생산국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프린트 디자이너"로 알려진 사람은 이상하게도 없었다.
프린트 디자인 직종에서 일하던 한국인 동료들은 한국으로 돌아오면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패션 디자이너로 전향을 했다.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인-하우스 텍스타일 디자이너 직종이 부재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러스트레이션 시장이 무섭게 커져있었다. 코엑스에서 연간 2회 열리는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의 인기와 신청을 받기가 무섭게 동나는 참가 부스만 보아도, 특히나 젊은층을 중심으로한 그 수요와 직업으로서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얼마나 각광받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또 하나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던 것은 "굿즈" 시장이다.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전시 출구 부분 뮤지엄 샵에서 기념품으로 스테이셔너리와 컵, 간단한 직물 제품에 전시의 대표 작품을 프린트 하여, 집으로 그 여운을 가져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던 그 부분이 엄청난 비중으로 커져있었다. '전시는 없고, 굿즈만 남았다' 라는 오묘한 첫인상 이었다.
더 관찰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독립된 시장으로 이제 하나의 카테고리가 되었다. 미술품과 '굿즈'는 다른 시장이 되었던거다. 갤러리보다는 마켓에 더 익숙한 단어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거다. 그 어느나라보다 활성화된 온라인 판매루트와 진입장벽이 없이 개인이 쉽게 참가할 수 있는 마켓을 타고 '굿즈'가 하나의 상품군이 되었다.
품질 좋고 아기자기한 귀여움이 있는 스테이셔너리에 우리는 매우 익숙하다. '아트박스'가 유럽에 진출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학교 앞 코너마다 있던 그 문구샵이 런던의 랜드마크 백화점에 럭셔리 브랜드와 함께 입점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생소함과 비슷한 생소함이었다.
일러스트 페어에 참가하고 나면, 수많은 '아트 쉐어링' '아티스트 지원' 플랫폼에서 제안서가 온다. 굿즈 제조와 생산 과정이 생소할 수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에세 그 과정을 대신 해결해 주고 커미션을 받는 수많은 플랫폼 또한 몇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쿠션커버, 티셔츠, 에코백, 핸드폰 케이스, 머그컵, 모자 등에 아트워크를 넣어 제작해 준다.
'프린트 디자이너'라는 직종의 부재 아닌 부재가, 이렇게 해결되고 있는 것 같았다. 프린트 디자이너의 일(아트워크 생산과 그것을 파일로 만들어 물품에 프린트하는 과정의 진행)이 두 분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과, 프린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만 '프린트 디자이너'가 부재하므로 '일러스트 기반의 굿즈를 주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 모두 일러스트 페어에 나와, 아마도 그렇게 발 디딜 틈 없이 커지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근대사와 함께 발전한 프린트 디자인 산업에서의 프린트 디자이너의 직종은 어쩐지 선호하지 않는 직업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정작 한국인은 모르고 수주를 주는 입장에서 그 산업을 보아온 외국인들은 아는 우리 '텍스타일 프린트 디자이너'는 '아티스트'와는 어쩐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의 '작가님'과는 그 어감이 어쩐지 다르다.
왜 없을까, 여겼던 그 역할은, 이미 있었다.
분리된 영역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작가의 영역과 프린트 디자이너의 영역이 교차되기 시작한 건 아마도 한참 전의 일 같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굿즈'라는 어감이 주는 탓인지, 여전히 '프린트 디자인'의 영역이 무엇의 세컨드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랄까. 독립된 아티스트로서 '프린트 디자이너'는 여전히 생소하게 느껴진다는 점. 구찌와 돌체앤가바나에 있는 프린트 디자이너가 주는 그 '멋짐'이 어감에서 아직 느껴지지 않는 다는 점.
+) 조금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굿즈 마켓의 폭발적인 성장이 새로운 시장과 가능성을 열고 있지만, 조금 씁쓸 하기도 하다.
아티스트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은 한달에 소량의 금액을 내면 정기적으로 수백 수천 아트워크 중 몇 개 골라서 집에 걸어둘 수 있도록 '원화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아트 프린트를, 몇주에서 한달마다 새로 보내준다. '아트 프린트'의 에디션은 아마도 무한정인 것 같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인테리어 느낌을 바꿀 수 있도록' 그렇게 해준다. 철마다 바꾸는 인테리어 소품의 일부가 되었다.
좋은가 싶다가도, 무언가 이-브랜드에서 새로낸 버거 프랜차이즈의 캣치프레이즈 같다.
Why pay more, it's good enough.
큰 돈 들이지 않아도 되고, 걸어두면 방이 환해보일 만큼 충분히 예쁘다. 싫증나기 전에 새걸로 보내준다.
적당히 (혹은 많이) 예쁘면 되지, 또 뭐가 중요한가. 빠르게 받고, 소비한다.
미술품, 혹은 아트워크와 대중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복잡다단한 생각이 들어간 작품을 타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석해주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미술품을 타인의 눈높이에 맞춘 느낌이랄까. 그저 다른 방향인 것이겠지만, 트렌드에 따라 한눈에 보아 인스턴트로 예쁘지 않은 것들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진다.
작품을 보고 사유할 인내심은 플랫폼이 대신 해준다.
입을 벌리자마자 바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은 선반 뒤로 밀려난다.
'소비재'는 그런것이지 않은가, '예쁜게 장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