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기
제가 중, 고등학생이었을 때, 교과서를 깜박하고 학교에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이 있으면 선생님께서는 종종 "군인이 전쟁에 나가는데 총을 가져가지 않으면 되겠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쟁터에서 총이 군인의 생명과 직결된 무기이듯, 학교에 학생에게 가장 필수적인 책을 가져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비유였습니다. 군인에게 총이 가장 중요한 무기라면, 내과의사에게는 청진기가, 가수에게는 마이크가 각각 병원과 무대에서 꼭 챙겨야 하는 무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을 하는 저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파이펫 (혹은 피펫, pipette)입니다. 언뜻 보면 길고 뾰족하게 생겨서 총 같기도 합니다.
음식을 만들 때 요리법에 따라 간장 한 테이블스푼, 설탕 한 티스푼을 넣듯이, 실험을 할 때도 실험 순서가 나와 있는 프로토콜 (protocol)에 따라 적당량의 화학물질을 첨가합니다. 대용량의 시약을 만들 때는 밀리리터 (mL)나 리터 (L) 단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실험을 할 때는 마이크로리터 (µL) 단위로 화학물질을 넣기 때문에 마이크로리터의 액체를 측정하여 옮길 수 있게 하는 이 파이펫들이 제가 매일 사용하는 제 무기입니다. 각 파이펫은 종류에 따라서 옮길 수 있는 액체의 양이 다른데, 이 파이펫들의 끝에 각각의 파이펫에 맞는 팁 (tip)이라고 불리는 끝이 뚫린 고깔을 끼웁니다. 그리고 화학물질을 취해서 옮기면 됩니다. 버릴 때는 위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팁이 분리됩니다. 그러고 보니 파이펫은 더 총 같고, 팁은 꼭 총알 같습니다.
아무리 같은 파이펫을 사용한다고 해도, 실험자에 따라 오차 범위는 꽤 큽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크로리터 단위의 작은 오차가 실험 결과의 큰 차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도 파이펫을 사용하여 실험을 했습니다. 내일도 제 삶의 전선인 실험실에서, 제 무기인 파이펫으로, 꼼꼼히 오차를 줄이면서 좋은 결과를 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