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양 Aug 18. 2020

밥벌이(1)

-제이콥 마리스, 쿠르베, 도미에, 밀레, 바다와 대지의 일꾼-

 바다의 일꾼


 이제 막 동이 튼 바닷가, 시커먼 바닷물이 황금빛 아침 햇살로 물들어 가고 항해 준비를 마친 배가 하늘 높이 돛을 올렸다. 어부들은 만선을 기대하며 일찌감치 배에 올랐지만 아직 떠날 채비를 끝맺지 못한 한 사내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다. 어느 젊은 가장이 처자식과 애틋한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 로도윅 제이콥 사디Philippe Lodowyck Jacob Sadee, <어부의 작별>

 오랜 시간 집을 비울 예정인지 남자는 가기 전에 아이를 한 번 더 품에 안아보려 한다. 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여인의 심경도 무겁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험준한 바다로 나가는 남편이 걱정되고 아비를 찾으며 날마다 울며 보챌 아이들을 홀로 돌봐야 할 일이 벌써부터 고되다. 필립 로도윅 제이콥 사디가 그린 <어부의 작별>이다. 

 19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풍경화가 제이콥 마리스는 떠났던 배가 이윽고 당도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배의 도착>이다. 

 사방이 물안개로 자욱한 바닷가에 아이와 노인 할 것 없이 다 나와 찬 바람에 몸을 떨며 어서 배가 당도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제이콥 마리스Jacob Maris, <배의 당도>, 1884

 마침내 배가 정박하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반가운 얼굴을 맞대고 그동안 못 나눈 인사를 나눌 것이다. 마을 여자들은 지고 온 망태기와 소쿠리에 물고기를 한 가득 담아 시장에 내다 팔 것이다. 자연에서 얻은 양식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필요한 것을 구비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킨다.   

 그림의 배경인 슈케베닌겐(네덜란드 헤이그 근처) 바닷가 풍경은 제이콥 모리스와 더불어 우리에게 친숙한 빈센트 반 고흐까지 여러 더치 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한다.

 나는 재작년 여름, 암스테르담 미술관 Rijksmuseum에서 제이콥 마리스의 <배의 도착>을 처음 접했는데,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보자마자 단번에 압도되었다. 회색과 갈색조로 이루어진 차분한 화면에 평범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은 이 풍경화에서 나는 대성당의 제단화에서나 경험할 법한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꼈다. 

 비단 자연(영원자)에 의존하는(자연으로부터 양식을 얻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아직 남아있지만, 이 그림에는 낭만주의의 신비하고 몽환적인 정조, 종교적 환상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필립 로도윅 제이콥 사디, <새벽, 어부의 아내들>

 그것은 현실을 사는 인간과 그들의 실생활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자연 앞에서 두려움으로 전율하는 무력한 존재가 아닌 자연과 협력하며 의지적으로 사는 주체적인 모습의 인간이다. 어떠한 허상도 허위도 입히지 않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그날그날의 밥을 버는 보통사람들의 곤궁한 삶과 정직한 밥벌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지의 일꾼


 앞서 본 세 점에 그림에서 우리는 유럽의 중심 해상무역국가로 경제적 번영을 크게 누리던 네덜란드의 황금빛 위상일랑 전연 볼 수 없었다. 산업혁명과 비약적으로 발전한 경제사정에도 다수가 가난한 촌부들이었다. 프랑스만 해도 19세기 후반까지 인구의 3분의 2가 프롤레탈리아트 였다. 이들은 농부, 어부, 가내수공업자, 대장장이 땜장이 같은 기능 노동자, 시간제 공장 노동자들로서 절반 이상이 빚더미에 시달렸다.

오노레 도미에, <삼등칸 열차>, 1862

 파리의 오스망화로 빈민계층수는 날로 늘었고 파리코뮌 이후 하층계급민에 대한 맥마흔 정권의 통제 또한 심화됐다. 공공을 위한 현대식 도시로의 변모라는 공리주의 이면에는 부패한 전제주의의 이해와 촘촘하게 짜여가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가 지배하고 있었다.1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문제와 소외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목격한 당대 파리의 작가들과 화가들은 이를 자신들의 예술 주제로 삼았다. 보들레르가 시를 쓰고 플로베르, 스탈당, 졸라, 발자크가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근대적 소설을 썼다. 오노레 도미에는 대표적인 프롤레탈리아트 화가로서 파리의 노동자의 남루한 실상을 보여주는 캐리커처와 인물 풍경화를 그렸다.

구스타프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1850

 구스타프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들>은 사실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그림으로 거론된다. 그림은 두 명의 인부가 돌을 깨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수아 밀레가 농부들에게 빠져들었던 어떤 애감이나 목가적인 감상일랑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쿠르베는 오로지 보이는 실상 그대로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충실하게 그렸을 뿐이다. 청년의 얼굴은 돌려져 있고 노인의 얼굴은 모자에 반쯤 가려져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화가 개인의 호감이랄까 동정이랄까 하는 것들을 일체 배제하여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쿠르베가 별 의미 없이 이와 같은 화제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두 인부의 나이 차이가 암시하는 의미에 주목했다. 돌깨는 노동을 하기에는 노인은 너무 늙었고 청년은 너무 어리다는 사실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쿠르베가 추구했던 사실주의는 양식적인 혁명이 아니라 주제 문제와 관련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도 리얼리스트, 즉 진짜 진실의 참다운 벗이다", 라는 쿠르베의 말에 비추어 보면 그에게 사회적 진실과 예술적 진실이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는데, 그에게 진실은 정직과 성실 윤리적 행위를 의미했다. 쿠르베는 이 진실을 가난한 무산계급 노동자들의 삶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이들의 고단한 '노동', 부자로부터가 아닌 가난한자가 가난한 자에게 배푸는 '자비', 보통 사람의 '장례'의 주제를 아주 기념비적인 거대한 크기로 그렸다. 이러한 회화 양식 때문에 쿠르베가 아무런 편견이나 미화없이 오직 완전한 사실만을 그리고자 했다는 의도는 부정되었다. 그는 노동자를 지나치게 이상화시키고 사회주의적 정치적 태도를 은근히 내비치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웠다.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
황혼이 깃드는 순간 찾아오면 
모두 감탄이지 대문 아래 앉아
낮의 마지막 섬광을 바라봄은
노동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함은

바라보네 밤을 머금은 대지를
감격으로, 그의 해진 넝마를
늙은 손으로 한 움큼 뿌려대는
고랑에 박힌 미래의 수확을 
(빅토르 위고, 〈파종의 계절, 저녁>)



 이제 밀레의 대표작들을 살펴 보자.

 석양이 빨갛게 지는 들판에서 한 젊은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있다. 빠르고 능숙한 손 동작으로 거침없이 들판을 종횡무진하는 모습이다. 

 그의 남루한 옷차림과 검게 그을린 피부를 보건대 그의 삶이 그리 넉넉치 않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 젊은 농부에게서 흡사 미켈란젤로식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자신이 씨를 뿌리는 그 땅의 흙으로 칠해진 듯(테오필 고티에)한 모습. 땅과 결합된 순박함, 근면함, 불쌍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선량함,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밀레의 농부는 남루하지만 긍지에 차 보이는 모습... 만약 톨스토이 소설의 농부가 시각화된다면 꼭 밀레의 농부를 닮지 않았을까?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

 다음으로 <이삭줍기>를 보자. 아마 이 그림만큼유명세와 대중성이 높은 그림도 없지 싶다.

 한참 일에 빠진 세 여인들의 저 강건한 육체를 보라. 그리고 이 육체를 둘러싼 저들의 진실된 정신성과 영혼을. 마치 조각처럼 새겨 있지 않은가.

 당대의 이지적인 문인 고티에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화가 고흐는 이 그림을 격찬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관습적인 화풍과 도시성의 유행에 경도된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한낱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1857-1859

 저녁종 울리는 소리에 일을 멈추고 조용히 기도올리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또한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작품이다.

 1865년, 밀레는 만종을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친구에게 편지로 썼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장 프랑수아 밀레, <집으로 소몰이>, 1872

 그런데 밀레는 어째서 척박하고 황량한 들판에 경도되었을까? 왜 하필 농부의 초상이 그의 예술인생에 절대적인 주제가 되었을까? 

 나의 궁금증에 밀레가 답한다. "어째서 감자를 재배하는 사람의 행동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 덜 흥미롭고, 덜 고귀한 것처럼 여겨집니까?"  

 삶의 조건으로서의 대지는 황량하고 척박하다. 그러나 이 혹독한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씨를 뿌리고, 땅을 갈고, 풍성한 추수를 기대하고, 두 손 모아 감사와 소망을 담은 기도를 올리는 모습에서 교회의 종소리와 같은 웅변적인 숭고함이 왕왕 퍼진다. 가히 농민들에게 대지는 구원이요 노동은 순교와도 같으리라.





1)홍석기,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 생각의 나무, 2010.


[참고문헌]

린다 노클린, 권원순 옮김, 『리얼리즘』, 미진사, 1997.

홍석기, 『인상주의: 모더니티의 정치사회학』, 생각의 나무, 2010.






매거진의 이전글 밥벌이(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