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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18. 2021

유토피아

-추상미술 2. 피에트 몬드리안-

풍경화가로 시작하여


 네덜란드 태생의 몬드리안은 아마추어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었으면 했으나 몬드리안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화가의 길을 택했다. 

피에트 몬드리안, <저녁무렵의 풍차>, 1906

 그는 산업화에 훼손되지 않은 풍경을 찾아 산으로 들로 떠돌았다. 마음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면 세심한 관찰력과 꼼꼼한 묘사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됐다. 당시 유행하였던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의 양식과 신인상주의 양식을 종합적으로 수용한 그의 풍경화는 대중들의 취향에 꼭 맞았다. 풍차가 돌아가는 들판과 달빛이 비치는 해인 강가, 울레 부근의 울창한 나무숲, 오테를로 근처의 황야는 코로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고 신비스러우며 고흐의 그림처럼 찬란했다.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 풍차>, 1911

1909년, 동료 화가들과 함께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가진 전시회의 성공은 몬드리안에게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평단의 지지까지 안겨 줬다. 특히 <저녁: 붉은 나무>가 평단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성공을 갈구한 그의 앞날은 순탄해 보였다. 그러나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세잔 기념전》은 지역 화가로서 평탄한 길을 걷던 몬드리안에게 큰 변곡점이 되었다. 견고한 구조적 형태와 단순한 조형적 법칙으로 그려진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후 몬드리안의 그림에는 세잔의 영향력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해 여름에 그린 <모래 언덕>은 젤란트 북해 연안에서 본 바닷가 풍경으로 단순한 구성에 절제된 묘사가 눈에 띈다. 이전의 화풍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어서 그림 <붉은 풍차>, <진화>는 보다 더 상징적인 형태를 갖췄다. 몬드리안이 더 이상 시각적 경험에 토대를 두지 않고 추상적인 형태를 실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갑자기 달라진 그의 화풍에 대중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몬드리안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대중들은 그동안 보여준 환호와 찬사를 거두고 그의 그림보다도 훨씬 더 차갑게 돌아섰다.

 졸지에 후원자를 잃고 생활은 궁핍해졌으나 새로운 예술세계에 이제 막 눈 뜬 화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해 겨울, 몬드리안은 자신의 예술적 개성을 발현하고 화가로서의 기량을 닦고자 파리로 떠났다. 자신의 이름인 피테르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떼어내고 피트 몬드리안으로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피카소를 넘어서     

“시대정신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있다. 낡은 것은 개인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새로운 것은 보편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 새로운 예술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함축하는 바를 표현하게 되었다”(『데 스틸 선언문』, 1918).     

 

피에트 몬드리안, <꽃이 핀 사과나무>, 1912

 파리에서 홀로 생활하며 작업에 매진하는 삶은 외롭고 고되었지만 비약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몬드리안은 세잔의 후예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양식을 터득하며 열심히 자신만의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 그는 나무를 주제로 하여 면과 선적인 구조를 실험했다. 작품 <꽃이 핀 사과나무>를 보면 흰 빛이 감도는 분홍색 꽃나무의 인상을 일부 가지고 있으나, 나무의 외양을 재현하길 그치고 형태를 해체하여 그물망을 짜듯 전개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삼 년 뒤 여름,  잠시 머물 요량으로 네덜란드에 돌아온 몬드리안은 그만 발이 묶여버렸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바로 세계 1차 대전이다.

  갑작스러운 전쟁의 발발로 파리에 갈 수 없게 되자 하는 수없이 그는 파리의 화단과 단절된 채 홀로 작업해야 했다. 그는 바닷가를 자주 산책한 하며 바다 풍경을 여러 장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때 그린 바다 풍경 연작은 피카소와 브라크에게서 배운 입체주의를 넘어서서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수립하게 만드는 초안이 되었다.  


피에트 몬드리안, <검정과 흰색의 구성 No.10 부두와 해양>, 1915

 그림 <검정과 흰색의 구성 No.10 부두와 해양>은 출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몬드리안은 파도를 관찰하면서 그것의 변덕스러운 리듬과 서로 밀고 당기는 에너지 장을 주목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파도의 이미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의 속성을 요약하고 응축하여 그리고자 했다. 이 실험은 가장 핵심적이며 불변하는 근원적 형태인 +,-라는 기호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기호는 파도의 형태와 내용이 합일된 것으로 가시적인 외양이 비가시적인 본질로 대체된 것이다. 몬드리안은 모든 자연에 이러한 내재된 속성, 즉 절대적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바로 수직선과 수평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인데, 이는 이후 몬드리안의 회화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

 그는 두 권의 책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조형적 수학』을 놓고 공부하며 기하학 추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위해 탐구했다.                           


“우리들의 존재 전체는 양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이 활동에는 생의 비탄과 지복(至福)이 모두가 포함된다. 비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끊임없는 이별이며 (…) 불변적인 것은 모든 비탄과 모든 지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것이 균형이다”(피에트 몬드리안).


새로운 삶 새로운 예술


 전쟁의 한 복판에서 비켜서서 조용히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였지만 전쟁이 불러온 불안과 회의주의는 그의 아뜰리에까지 미쳤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점차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피에트 몬드리안, <컴포지션 블루>, 1937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글로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헤겔의 철학에 관심을 갖고 지식을 쌓았으며 소위 아방가르드한 사상을 가진 지성인들과 교제하며 자신의 미술이론을 수립해 나갔다. 그리고 1917년, 테오 판 두르뷔르프와 함께 '데 스틸(De stijl, 영어의 스타일을 즉 양식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이라는 추상미술 그룹을 만들었다. 데 스틸은 1931년까지 회화, 조각, 디자인, 건축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 미술운동을 이끌었다.

 그룹의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데 스틸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양식의 창조에 있었다. 그것은 '보편성'을 의미했다.1  모든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힘을 표명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말로 '순수미'라고 할 수 있겠다.

 몬드리안은 예술이 현실의 우연적이고 불안하고 변덕스러움과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으로,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삼원색과 삼무채색을 회화의 기본적 요소로 한정하여 '변치 않는 실재'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참혹한 파괴의 시대를 관통하며 필명성을 넘어서려는 한 인간의 열망이자 유토피아인 것이다.

피에트 몬드리안, <뉴욕 시티 1>, 1941-42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세계, '에테르의 세계=참 실재', 그것은 한마디로 논리로 구성된 관념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 한계를 넘어 정신의 주관적 확산을 가능케 하는 세계 말이다. 몬드리안은 예술의 세계를 플라톤의 이데아 즉, 영원하고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보편자의 세계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예술이 자연의 재현 (모방)이라는 낮은 위치에 머물지 않고 영원의 보편적 세계를 표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2  다음은 플라톤의 『필레부스』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직선적인 것과 곡선적인 것, 그리고 그것들을 컴퍼스와 자, 직각자 등으로 구성해 만든 평면적이거나 입체적인 형태들이다. 이러한 형태들은 다른 것들처럼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항상 그 자체의 본성으로서 아름답다."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의 견지에서 보자면 사물의 형태는 기하학적 형상들을 통해서 구현되므로 기하학적 질서만이 영원한 것이다. 곧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영원한 형상들이다. 이는 몬드리안이 창시한 신조형주의*의 개념과 맞닿는다. 

 1920년, 몬드리안은『신조형주의』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미술이론을 공표하였다. “새로운 조형은 개별적인 것, 자연적 형상과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것 속에 은폐될 수 없으며, 직선과 명확히 한정된 색채로써 형상과 색채의 추상에 의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곧 몬드리안의 추상은 사물의 가장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핵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정신의 극대화된 에너지와 연결되며 선, 미, 진실의 집결이다.3 

 그의 회화론은 신지학**영향을 받음으로써 더욱 발전되었다. 신지학은 물질을 정신의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물질적은 외형은 파멸되고 새로운 정신의 시대,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몬드리안에게 주었다. 이는 사교집단의 광신자들과 같은 자세가 아니라 종교에서 비롯된 도덕적 가치를 예술의 재능과 접목시켜 위대한 회화의 발전을 꾀하기 위함이었다.4

 이와 같이 보건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는 도덕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의 이중적 의미가 크다.

                       

신념과 집념의 유토피안     

 만년의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그의 마지막 예술 혼을 불태웠다. 뉴욕은 이미 칠순에 가까운 노화가에게 짧지만 눈부신 다이아몬드 같은 광채를 부여했다. 파리에서 선보인 잔잔하고 정제된 선의 리듬은 뉴욕의 역동적이고 활기찬 에너지를 흡수한 듯 빠르고 경쾌하며 역동적인 스타카토로 고양되었다.   

피에트 몬드리안, <빅토리 부기우기>, 1944

 그것의 결정체는 <빅토리 부기우기>이다.  몬드리안이 18개월 동안 매달려 작업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눈부신 다이아몬드를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하고 그는 72세의 생일을 5주일 앞두고 생을 마감했다.

 몇 해 전, 나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소재한 현대미술관에서 몬드리안 기획전을 관람했다.

 몬드리안이 이룩한 위대한 예술 성취와 그의 작품이 주는 심미적 즐거움은 차지하고서라도 내가 그의 작품에서 감명을 받을 만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화면에 온전한 격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화가가 쉼 없이 기울인 '지우기와 덧칠의 반복'에 있었다. 안료를 두텁게 바른 바탕 위로 거짓 없이 배여 나오는 실수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전달되는 화가의 떨리는 숨결, 완벽의 추구에도 끝내 감추지 못한 미세한 요철들. 그 미완의 완전성이란!     

 당시 작업에 열중한 화가를 옆에서 지켜봤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이제 와서 보니 이 작품은 망가진 걸작이다! 몬드리안이 이 작품을 완성한 것만 수차례였다. 그러나 매번 그는 마무리한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여 친구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이와 같은 몬드리안의 작업방식은 흡사 탈무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5   

 생각건대 몬드리안처럼 큰 세계를 선과 색으로 응축하는 일이란 흡사 머릿속에 내린 잔뿌리 같은 상념을 하나둘씩 제거해가는 과정과 비슷할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정제되고 다듬어진 정신이요 고통의 토대 위에 빛나는 완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어찌 잔머리 한 올 없이 말끔하게 묶은 어린아이의 머리 모양과 같이 매끈할까! 대상의 내면성으로 파고 들어가 본질과 만나고 그 깨달음을 수평선으로 수직선으로 풀어내는 일이 어찌 껄끄런 부딪힘 하나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가 이룬 빅토리는 '나와 나', '나와 외부항' 이 서로 부딪히고 교감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요철로 이루어졌다. 부서지고 깨지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예술 신념을 지키며 자신의 화면을 정체해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 이 얼마나 인간적이고도 초월적인 것인가. 얼른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화가의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는다. 그리고 그 옆에, 몬드리안이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숨을 참아가며 화폭에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풀어낸다.

 때때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 탓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몬드리안이 처음 세운 회화 이론으로 자연의 재현을 거부한 새로운 기하 추상 원리이다. 신지학을 포함한 신비주의를 통해 세계를 조망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기독교 문명에서 볼 때 이교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불교를 포함한 동양의 여러 종교들의 신조를 포괄하고 있는 절충적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미학 원리이다.     

신조형주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1)조형 수단은 삼원색, 무채색에 의한 평면 또는 사각형이어야 한다. 건축에 있 어서 공간이 무채색에 해당되고 재질은 색채로 간주된다. 2)조형수단의 등가성이 필요하다. 크기와 색채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치를 가진다. 균형은 일반적으로 무채색의 큰 평면과 색채 또는 재질의 작은 평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3)구성에 있어서 조형수단 가운데 대립적 요소의 이원성이 요구된다. 4)영속적인 균형은 대립에 의하여 달성되고 풍요한 대립을 표시한다. 즉, 직각 위에 교차 하는 직선(조형수단의 제한)에 의해 표현된다. 5)조형수단을 중성화하고 없어지는 균형은 조형수단을 차지하고 있는 균형에 의 해 달성 되고 그것은 생생한 리듬을 창조한다. 6)모든 대칭은 배제되어야 한다(Piet Mondrian, "Neo-Plasticism", Bauhausü Cher No5, pp.24-25. 박혜진,「피트 몬드리안의 1941-44년 뉴욕시기 작품연구」,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08, 12쪽, 각주 21번).      

**신지학의 주요 이론은 물질적 원리와 정신적 원리로부터 비롯된 만물이 이원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만물은 빛과 어둠, 수직과 수평, 남성과 여성의 대극(opposites)으로 구별되고 모든 만물은 서로 상응(correspondence)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의 대사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지학의 교설을 진지하게 탐구한 몬드리안은 1909년 5월 14일에 네덜란드 신지학회 암스테르담 지부에 정식 회원이 되었다(Yve Alain Bois, Joop Joosten, Angelica Zander Rudenstine, Hans Janssen, "Piet Mondrian", 1995, p.27. 박혜진,「피트 몬드리안의 1941-44년 뉴욕시기 작품연구」,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08, 4쪽 에서 재인용).                         

 


1)윤난지,『추상미술과 유토피아』, 한길아트, 2011, 271~275쪽.

2)박혜진,「피트 몬드리안의 1941-44년 뉴욕시기 작품연구」,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청구논문, 2008, 8쪽.

3)김현화,『20세기 미술사: 추상미술의 창조와 발전』, 한길아트, 1999, 92쪽.

4)위의 글, 85쪽.

5)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이브 알랭 부아, 벤자민 H. D. 부클로, 데이비드 조슬릿,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배수희, 신정훈, 오유경, 김홍기, 오윤정, 조현정, 김일기, 유정아 옮김, 김영나 감수, 세미콜론,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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