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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에세이
핑계가 많은 야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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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Apr 24. 2024
밤 11시. 잘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겁다.
진미채볶음, 감자볶음, 어묵마늘종볶음, 견과류 멸치볶음, 우엉조림... 오후 내내 지지고 볶은 것으로 차곡차곡 냉장고를 채우고 저녁엔 안 떨어지는 엉덩이 간신히 떼어 운동도 다녀왔건만, 나는 어째 꼭 해야 할 것만 쏙 빼놓고 다 한 것 같은 한심한 기분이 든다.
글 써야 하는데, 뭘 해도 이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그냥 그러다 끝났다. 오늘도.
절반가량 쓴 오지호의 <사과밭> 그림 에세이는... 완연한 봄의 정취가 만개한 그림이니까 5월 되면 마저 쓰자.
벨라스케스의 <마르타
의 집을 방문한 예수> 그림은... 이건 기독교 모티프이지만 나는 신자유주의와 연관해서 다루고자 하니 우선 공부부터 하자.
그리고 단편 소설은... 일단 자료부터 더 모으자.
열거해놓고 보니 당장에 쓸 수 있는 글이 없다. 고지식한 '완벽주의'와 교묘한 '미루기'의 판타스틱 이중주다.
그런데 나는 왜 공연한 것에만 부지런을 떠는지. 가뜩이나 비싼 식재료 상하기 전에 얼려 놓을 요량으로 애호박, 당근, 마늘, 양파, 파 죄다 꺼내 한밤중에 신나게 칼 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더 썰어 낼 것이 없자 당혹스러운데...
글도 칼질하듯이 쓸 수는 없을까? 머리의 개입은 최대한 막고 오로지 타이핑을 치는 손가락의 근육만 허용하여. 무심히.
손가락에선 마늘 냄새가 나고 간만에 안 쓰던 근육을 썼다고 팔은 결려오는데 또 러닝머신 고거 잠깐 뛰었다고
슬슬 배가 고프다.
이럴 때 먹으려고 단호박 썰어서 얼려 놓은 게 한 봉지 가득인데 역시 저지방 저탄수화물 음식은 야밤엔 안 당긴다. 나는 냉동고에서 고기만두 한 주먹을 꺼내 에어프라이에 돌리고 캔 맥주도 하나 꺼내 들고 넷플릭스 볼 준비를 한다.
두둥!
채널을 돌리는 내 바쁜 손놀림 위로 지져스의 어록이 쓰윽 지나간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 6:34)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래도 그 말이
적잖이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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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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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키라의 박물관 여행. 8: 예르미타시 미술관
저자
학부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헸으나 오래 못 버티고 나와 지금은 홀로 연구하고 글을 씁니다. 해방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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