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환경
나는 예기치 못한 순간, 예기치 못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는 미리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연습을 했다. 마치 벽을 세우듯, 마음이 무너져 내릴까 봐. 그렇게 나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나를 가두는 벽이 되어버렸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처럼 자신만의 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지키다 보니, 기쁨에도 벽이 생겼다. 좋은 일이 찾아와도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아 쉽게 기뻐할 수 없었다. 어릴 적, 기쁜 순간을 온몸으로 표현했다가 오빠에게 심하게 맞았다. 나는 왜 맞는지도 모른 채 당황했고, 그 기억은 깊은 곳에 남아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기쁨을 숨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자연스러워야 할 감정이 나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나의 반응은 감사뿐이었다. 기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이 내게 왔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되새겼다. 너무 크게 기뻐하면, 언젠가 그것이 사라질 때 더 아플 것 같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기쁨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태도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더 조용하고, 더 깊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미덕이었다. 기쁨처럼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감정과 태도 사이에 있는 것'
그 태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태도는 바로 '겸손'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내 안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환경이 가르쳐 준 것이었다. 나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스스로 겸손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선택은 이미 환경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 있었다. 겸손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결국 겸손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마치 강한 바람이 나무의 결을 새겨 넣듯, 사람 또한 자신이 놓인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겸손은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도 있지만, 환경을 거치며 다듬어지고 깎이며 비로소 태도가 된다. 거센 바람에 오래 노출된 나무가 휘어지듯, 환경 속에서 다듬어지며 겸손을 배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비로소 겸손해진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기쁨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는지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진다. 나는 기쁨을 두려워했다. 그것을 드러내면 사라질까 봐, 너무 크게 기뻐하면 나중에 더 아플까 봐.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기쁨은 억누를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겸손이 기쁨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깊이 경험하고 나누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겸손한 사람을 만든다. 바람에 깎인 바위가 시간이 지나 부드러운 곡선을 갖듯, 환경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고 변해간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결국 겸손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기쁨은 마치 오래 닦인 돌처럼 부드럽고 단단하게, 그리고 조용히 내면에 스며든다. 억지로 움켜쥐지 않아도, 더 가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곁에 머무른다. 더 이상 기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흘러가는 대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단순히 겸손이 좋다거나, 기쁨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겪은 감정적 혼란과 환경적 요인들을 차분히 탐색하며, 진정한 기쁨과 겸손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