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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달, 4월

삶은 질문을 만들어가는 여정

by 고효경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답을 찾는 데만 몰두하며 살게 된다.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정답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삶은 언제나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하며 살아가는가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음악은 나에게 무엇인가?", "신앙은 나에게 무엇일까?"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물음, "나는 왜 사는가?"에 도달한다.


정오의 햇살이 병실을 환하게 비추던 날, 나는 혼자 엄마의 임종을 지켰다.

아빠와 오빠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그 사이 엄마는 숨을 멈췄다. 병실은 적막했다.

그때 의사가 들어와 가족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식사를 하러 나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환자가 곧 사망할 상태인데도 밥이 목에 넘어가냐며 화를 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일상은 계속 이어졌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그 사이 엄마는 숨을 거두고, 나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의 현실 속에서, 나는 사라져가는 엄마를 관찰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삶의 마지막 호흡, 엄마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을까?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나는 삶의 유한함과 죽음의 필연성을 온몸으로 마주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은 단순한 이론이나 철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삶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았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그 유한한 시간 동안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환자실에서 나는 수많은 마지막을 목격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모니터에 찍히는 불규칙한 심박 수치, 가족들의 흐느낌과 의료진의 분주한 움직임.

죽음을 앞둔 얼굴들은 때론 고요했고, 때로는 두려움에 일그러져 있었다. 죽음은 극적인 순간이 아니라, 조용하고 확실하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은 더 이상 시간이 아니라, 깊이가 된다.


어떤 이는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삶을 회한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순간, 삶을 단단한 시선으로 마주하고 싶다.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가 없도록,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위엄이 있도록. 그 모든 순간을 포용하고 나의 삶을 존중하고싶다.


삶에 대한 자존감을 잃지 않고, 그것이 단지 겉으로 보이는 고귀함이나 권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존중과 믿음에서 나오는 내면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내 마지막 순간에, 후회 없는 얼굴로 고요히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내가 믿어온 것들을 돌아보며,

그 안에서 흔들릴지라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다.


흔히 죽음을 준비한다고 하면 추억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을 고하는 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정한 준비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살아오면서 무엇을 믿었으며, 무엇을 의심했으며,

무엇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순간, 나는 어떤 얼굴로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삶을 정답이 아닌 질문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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