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
봄이면 자연이 초록빛 옷을 입는다고들 하지만, 내가 본 제주의 3월은 노란 물결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유채꽃들이 일렁였고, 햇살에 반사된 노란빛이 내 눈앞에서 부서졌다. 알래스카에서 돌아온 나는 마치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물건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공허함 속에서, 나는 숨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온 곳이 제주였다. 무엇보다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선택한 곳이었다.
내가 제주에서 머물던 곳은 모슬포 근처,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낡은 나무 마루가 깔린, 오래되고 방음도 되지 않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바람은 벽을 타고 스며들어 방 안을 감돌고 밤이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람이 창과 지붕을 거칠게 흔드는 소리였다.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였지만 거친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나를 감싸는 작은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아침이면 그 주변을 산책하며 조용한 바람과 함께 하루를 열곤 했다. 제주의 바람은 따듯했다. 해가 떠오를 즈음이면 안개가 엷게 깔려 길 위를 덮었고, 그 속을 걸을 때마다 나는 마치 세상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길가에는 작은 풀들이 이슬을 머금고 반짝였고,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음이 깊은숨을 들이마시게 했다. 그렇게 걸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느 날, 문득 더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발길을 옮기다 보니 송악산 뒤편까지 걷게 되었다. 송악산 뒤편, 가파른 절벽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 바닷바람에 깎인 바위틈 사이로 작은 풀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위태롭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들풀을 발견했다.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강한 바람을 견디며 자라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단단했다. 처음엔 들꽃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작고 연한 꽃이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그 들풀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네 향기는 네가 아무리 숨고 감추려 해도, 바람이 불면 다시금 퍼지고, 햇빛 아래선 더욱 짙어지는구나. 사라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향기, 그것이 바로 너란다.‘
바람에 날리는 들풀이 나에게 속삭였다. 내 마음을 알아 줄 이 없는 풀에게 나는 조용히 다가갔다. 손을 뻗어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살며시 만졌다. 차갑지만 생명이 깃든 감촉이었다. 흔들리면서도 뿌리내린 그 작은 존재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뽑히지 않는 그 강인함이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들풀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바위틈에서 피어난 그 작은 꽃은 존재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기다림이 만든 풍경이었다.
한겨울 바닷바람을 견디고, 차가운 땅속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리던 꽃들이 드디어 고개를 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겨울이 끝나야 봄이 온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제주에서 그 순서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배웠다. 제주의 매섭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긴 생명은 봄이 오기 전 이미 꽃으로 피어 있었다. 마치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봄을 먼저 맞이하겠다’는 듯이.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이 있다. 제주의 3월은 나에게 그런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다. 언젠가 나도 저 노란 꽃들처럼 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봄은 결국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어쩌면 지금껏 나만 모르게 이 들풀처럼 삶이란 꽃으로 피어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