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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그리움, 4월

엄마 꿈

by Mu Mar 01. 2025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그 문장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4월이다. 어릴 적 엄마는 늘 진통제를 드셨다. 그때 나는 아홉 살, 엄마의 손이 한없이 그리울 나이였다. 아니, 지금도 엄마의 손이 그립다.

"엄마, 오늘은 몇 시에 들어와?" "오늘은 잔업이야. 10시에 들어올 거야... 아랫목에 밥 넣어 놨으니, 학교 갔다 오면 냉장고에 있는 국 데워서 먹어."

엄마는 피곤한 얼굴로 나를 안아주곤 집을 나섰다. 나는 그런 엄마의 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유독 추웠던 그해 겨울, 나는 겨울잠바 하나 없이 학교에 갔다.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함께 마시고 싶어서.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공장으로 갔다. 차도를 건너고, 어두운 시장 골목을 지나 후미진 길 끝에 있던 그곳. 그땐 무섭지 않았다.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이 더 컸다.

가로등이 깜빡이는 밤길, 바람이 스치며 낡은 간판이 삐걱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어둠을 가로질렀다. 시장 골목을 지나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나만이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은 무서워 앞만 보고 뛰었다. 숨이 차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면, 저 멀리 공장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속에서 엄마를 찾았다.

“엄마!”

달려가 엄마 손을 잡았다. 하루 종일 기계에 시달린 손끝은 거칠고 갈라져 있었지만, 엄마 손을 잡는 순간 무서웠던 밤이 사라졌다.

"우리 딸, 오늘도 기다렸어?" 엄마는 지친 몸에도 미소 지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하루를 버티느라 지쳤을 엄마에게도 나는 위로가 되었을까?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었는지, 내 마음속에 깊은 온기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갔다. 여전히 엄마는 바빴고, 나는 엄마의 부재를 익숙한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놀기도 하고, 사소한 이유로 엄마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점점 살이 빠지고 기력이 쇠약해졌다.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고, 약 봉투가 쌓여 갔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엄마는 아파하셨다.

엄마는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아침이면 힘겹게 일어나 출근했고, 퇴근 후에는 그대로 잠들었다.

"엄마, 좀 쉬면 안 돼?"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직 일할 수 있어."

그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는 결국 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해도 3개월, 하지 않아도 3개월입니다."

의사의 말이 무겁게 가라앉혔다. 엄마의 의지와 가족들의 마음을 모아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전날 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가 조금만 더 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일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호전되었고, 퇴원 후에는 교회 봉사를 하고 집 앞 텃밭도 가꾸었다. 그러나 간암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엄마는 점점 나의 아이가 되어갔다. 내가 곁에 없으면 화를 내셨고, 늘 가까이 있길 바라셨다.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출근하는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못 나가게 막았던 것처럼.

엄마의 투병이 길어질수록 피부는 검게 변했고, 살결은 메마른 장작처럼 갈라졌다. 황달로 인해 눈동자는 누렇게 흐려졌고,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목마름이었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간암 말기의 엄마에게 물은 독과 같았다. 간이 손상되어 체내 수분 조절이 어려워진 탓에, 물 한 모금만으로도 복수가 차올라 숨쉬기조차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목이 타는 갈증은 끝없이 엄마를 괴롭혔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엄마는 목마름을 참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나는 물컵을 들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잠시 나를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컵을 건넸고, 엄마는 힘겹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였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던 엄마는 물을 한 모금 머금었지만, 곧 조용히 다시 뱉어냈다. 엄마는 그저 입술만 축이듯 남은 물기를 혀로 훔쳤다. 그 순간, 엄마의 눈가에는 고통이 번졌고, 나는 그 모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물 한 모금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멀고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그제야 알았다.

엄마는 마지막 투석을 끝내고 코마 상태에 빠졌다. 정오의 햇살이 유난히도 맑았던 날, 병실 창문으로 따뜻한 빛이 스며들었다. 아빠와 오빠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고, 나는 엄마 곁을 지켰다. 주치의는 보호자가 어디 갔냐고 물었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점심을 먹으러 갔어요."

의사는 화를 냈다. "환자가 곧 임종을 맞이하는데, 보호자들이 밥을 먹으러 갔다고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그래서 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 현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나는 선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나는 엄마를 가만히 안았다.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만큼은 온전히 곁에 있고 싶었다. 그 공간에는 오직 엄마와 나, 단둘뿐이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 느껴졌다. 나는 엄마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엄마, 다 내려놓고, 이제 아무런 걱정하지 마. 천국은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 이래. 이제 편히 쉬세요."

엄마는 마지막으로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호흡을 내쉬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엄마는 일주일 전 내 꿈속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 노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엄마를 안을 수 없을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기에, 온기가 남아 있는 엄마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 따뜻함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그렇게 가만히 안았다.

엄마가 떠난 3개월 후, 나는 꿈을 꾸었다.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 딸, 잘 지내고 있지?"

꿈속에서 엄마는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 창문 너머로 우리는 마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그곳에서 내렸고, 나는 여전히 버스를 타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엄마는 내렸고, 나는 버스에 남겨진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하지만 꿈은 환상이 아니었다. 나는 꿈에서 본 장면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악보에 옮겼고, '엄마 꿈'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엄마가 부르던 찬송가는 여전히 내 삶 속에서 잔잔히 울리고 있다. 떠난 이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스며들 듯, 삶과 죽음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엄마의 노래는 끝나지 않고, 내 삶의 한 부분으로 깊이 남아 여전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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