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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눅눅해지는 6월

유명해지라는 말 앞에서

by 고효경

음원을 냈다는 이들의 SNS에는 이제 큰 반응이 없다. 좋아요는 줄고, 댓글도 뜸하다. 나 역시 신곡을 냈을 때, 예전만큼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게 됐다. 시간을 들여 만든 노래가 조용히 묻힐 때면, 어쩌면 나는 점점 더 잊히는 걸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말이 있다.


“방송 좀 나가. 방송을 타야 얼굴도 알리고, 음반도 팔리지. 일단 유명해져야 해.”

친한 지인들의 말이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그 말속에 틀린 건 없지만, 나는 그 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심사평을 받고, 순위를 매기는 그 과정이 나에게 익숙하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 있고, 어떤 이들은 그 무대를 통해 빛나는 가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음악은 감정을 나누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우열을 평가받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 무대 위에서 감정을 나누는 게 아니라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주춤하게 했다. 어쩌면 서바이벌 무대에서, 지금까지 나만의 속도로 살아낸 나의 그 모든 시간을 부정당할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 거센 심사평의 소음 속에서, 그들의 말 한마디, 편집된 장면 몇 컷, 자막 한 줄이 내가 쌓아온 결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늘 나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이라는 매체 속에서, 나의 진심이 컨셉으로 소비되거나 오해될까 봐 겁이 났다.

무대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음악인의 삶이란 단지 무대 위에 서는 일만이 아니다. 공연이 끝난 뒤, 군중 속에서 빠져나와 다시 혼자로 돌아온 방 안. 나와 내가 마주하는 고독의 리듬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일이,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쩌면 나는 무대 위에서보다, 무대 아래에서 균형감을 익히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도 모른다. 음악을 연습하는 시간보다도 말이다.

한국에 많은 음악가들은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때는 ‘음악으로 먹고살기’라는 제목의 콘텐츠가 수없이 쏟아졌다. 나는 그 제목에서 마음이 시렸다. 음악이 생계가 된다는 것. 그 말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말해준다.

게다가 소속 없는 예술가는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작품의 판매가 저조해지고 후원도 끊기면 존재 이유마저 흔들리기 쉽다. ‘갈 곳 없음’이라는 단어는 독립 창작자에게 가장 무서운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유명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명해지겠다고 발버둥 치는 방법도 잘 모르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유명해진다 해도, 그게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종종 말한다. “왜 섭외 오는 프로그램을 다 거절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맞는 말이다. 방송을 한두 번 거절하다 보니, 요즘엔 정말 아무 방송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한때는 방송에 나가 내 음악과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 사명처럼 느껴졌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나를 지키는 감정의 결이 더 중요해졌다.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요즘엔 “유튜브 좀 해봐”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걱정 반, 권유 반의 말들. 하지만 그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일, 꾸준히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일, 그리고 그 안에서도 내가 지켜내고 싶은 결. 그 모든 것이 노래 한 곡을 만드는 일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진심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내가 조심스럽게 방송을 거절하고, 유튜브를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만든 음악이 너무 쉽게 소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저 잠깐 보고 지나치는 영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노래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세상이 끊임없이 ‘유명해져야 해’라고 말할 때도, 나만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사람.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내 노래가 꼭 필요한 어느 마음에 우연히 닿을 수 있다면. 누군가 말 대신 음악을 붙잡고 싶어지는 순간에, 내 음악이 곁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내 음악이 쓸모를 다하는 소리로 남겨진다면, 나는 그걸로 감사하겠다.

언젠가는 내 노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내가 살아 숨 쉬는 동안만큼은 이 노래가 나를 그리고 또 누군가를 지탱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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