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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꺼내는 7월

마음을 꺼내도 되는 사람

by 고효경

너에게만은 내 마음을 꺼내보여도 괜찮다고 처음으로 믿게 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 앞에서는 언제나 단단했던 내가, 너 앞에만 서면 말랑한 아이가 되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 말이 나도 모르게 입술 끝에서 터져 나왔다. 너에게 어린아이처럼.
그 말에 나조차 놀랐다.
세상에서 나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말끝을 조이며, 마음은 옷 속 깊숙이 감췄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살아오며 알게 되었다.
잘 웃고, 불편한 감정은 감춘 채, 누구에게도 부담되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나 역시 누구의 짐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 스스로도 착각할 만큼,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너 앞에만 서면, 그 갑옷은 금세 벗겨졌다.
나의 작고 연약한 마음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서는 마음을 감춰야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너 앞에서는 내 마음이 들켜야 살아 있는 듯했다.
감정을 단단히 가두며 살아온 내가, 너라는 사랑 앞에서는 자꾸만 무장해제되었다.
내가 일부러 벗지 않았는데도, 내 안의 껍질은 스르륵 스스로 풀어졌다.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내 단단함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어느 날 너는 내게 말했다.
“네 손을 잡고 싶어.”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럼 잡으면 되지.”
그리고 나는 너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때 너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을 떨었고, 나는 그 표정이 귀여워 한참을 웃었다.

그랬던 너였는데 이제는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다.
너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나는 가끔 네가 처음 내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떨림이 그립다.
사랑은 익숙함 속에서도 계속 피어야 한다고 믿기에,
나도 모르게 너의 눈빛 속에서 그 처음의 조심스러움을 찾게 된다.

네가 날 아껴준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너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지고, 더 확인받고 싶어진다.
세상에서는 단단해지느라 지쳐버려서,
너에게만은 마음껏 흔들리고 싶다.

사랑을 더 구하는 마음.
그건 철없는 욕심이 아니라,
너 앞에서만 꺼낼 수 있는 내 진심이다.


숨이 차오르는 7월 어느 날,
마음까지 달궈지는 오후에 나는 너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내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면,
너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다.
너의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릴 때면,
나는 비로소 숨을 내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영상통화로 마주한 내 얼굴을 보며
“귀엽다”라고 웃는 너의 목소리가 좋아서
나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꺼내어 이야기했다.
그러다 내 얼굴이 화면에서 반쪽만 보이면, 그건 내가 졸리다는 신호였고
너는 그걸 알아채고 웃었다.
굿나잇 인사는 언제나 꿈속으로 놀러 가자며 보내는 너의 뽀뽀 입술이었다.
내가 그 표정이 웃겨 졸린 눈을 억지로 크게 뜨면
너는 그 찰나를 붙잡아 이제 너의 하루 이야기로 나의 잠을 붙잡았지만
나는 그만 너의 목소리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지금껏 세상을 전쟁터처럼 지나왔던 너와 나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말했다.

"어릴 적 나는 슬픔의 아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마음 깊은 곳에 가둬두었어"
이야기를 하던 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콧물과 눈물이 뒤섞여 얼굴이 흐려질 만큼, 너는 엉엉 울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너의 곁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너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지금 천사들이 너의 눈물을 바쁘게 담고 있어.
한 방울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야.
너의 소중한 눈물을 나한테 보여줘서… 고마워.”


사람들로 북적이던 커피숍 한가운데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우리 둘만 존재하는 울창한 숲 같았다.
세상의 소음이 저 멀리 밀려나고,
오직 너의 울음과 나의 숨결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너는 내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태어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눈물을,
너는 내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다.


가끔 그날을 떠올리며
“그때 내 어깨에 기대어 엉엉 울었잖아.” 하고
내가 놀리듯 말하면, 너는 온몸을 베베꼬며 내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서로를 만나고부터 우리는
아이처럼 웃고, 울고, 투정을 배워간다.
우리 사이에는 어린 마음을 꺼내도 괜찮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려도 허락되는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는,
어린 시절에 미처 부리지 못한 어리광을
이제야 서로에게 피우며 늦은 보상을 받는 듯했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고단한 하루의 끝, 잠들기 전 떠오르는 사람.
툴툴거리며 서로의 마음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너는 내게 안전한 사람이 되었다.


나 역시 너에게 서운함이 많아지는 건,
아마도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 아닐까?

처음으로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너는 내 안의 아이가 깨어나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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