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호 드르륵 쿵쿵쿵
가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현관에 남자 신발 하나라도 놔둬. 아니면 건조대에 남자 셔츠라도 걸어놔."
우리는 그걸 웃으며 여자 혼자 안전하게 사는 팁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진심 어린 조언이지만, 그 안엔 이 사회의 구조적 불안이 묻어난다.
지난 10년,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했다. 마음속으론 열두 번도 넘는 이사를 다녔다.
기억에 남는 집들은 대부분 '사건'과 함께였다. 그날도 퇴근 후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그 시간은 밤 8시. 아직 저녁 뉴스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내가 사는 집, 아래층 아저씨다.
그 후로도 하루가 멀게 아래층 아저씨는 인터폰을 하거나 초인종을 눌렀다. 늦은 밤은 아니었어도 낯선 남자가 혼자 사는 여자 집의 벨을 누른다는 건 언제나 공포가 될 수 있다.
한 번은 집에 들어가기도 전, 모르는 전화를 받았다.
"발을 어떻게 딛길래 쿵쿵거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치는 남자는 아랫집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발작이 극에 달하는 날에는 경찰을 부르기도 했고,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루하루가 예민한 경계 속에서 이어졌고, 그 불안은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밤이 되면 더는 숨 쉴 수 없을 것 같았고, 나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집을 떠났다.
그 후, 싱글들이 주로 사는 조용하고 안전한 공간이라며 부동산 중개인이 자신 있게 추천한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게 실수였다. 이사 온 첫날 밤, 낯선 집의 냄새도 가시기 전에, 벽을 타고 들려오는 격한 말싸움에 잠이 깼다. 시계는 자정을 넘겼고, 옆방의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됐다. 분명 조금 전까지 “꺼지라고!”를 외치던 남녀가, 이번엔 서로 꺼지지 못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사온 첫날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낯선 커플의 삶을 청취하며 시작되었다. 주말이 되면 오피스텔 전체가 클럽처럼 소란스러웠다. 사는 내내 진동하는 집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하다.
“그러니까 빨리 결혼해야지.”
하지만 혼자 사는 여자의 불안은 ‘혼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위협받을 수 있는 구조 그 자체다.
결혼은 선택이지, 누군가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되어선 안 된다.
그 이후부터, 전세 만기가 다가올 때마다 부동산에 가면 나는 습관처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됐다.
“이 집, 층간소음은 어떤가요?”
그 질문은 이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장치가 되어버렸다.
발품을 팔고 또 팔아, 마음이 놓일 만한 공간을 찾아냈다. 하지만 곧바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첫날밤은 무사히 넘겼다. 드디어, 이번엔 정말 집을 잘 골랐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 날, 자정을 넘긴 그 무렵,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층에서 들려왔다.
드르륵… 쿵쿵쿵.
“이건… 무슨 소리지?”
그날부터 나의 불면이 시작되었다. 6월, 여름의 문턱이었다. 창문만 열어도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고, 이불 없이도 깊은 잠이 가능한 계절. 그런데 나는, 그 바람을 등지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덮었다.
'6월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소음을 막아보려 이불속에 파묻혀 있자니, 이마와 목덜미가 금세 축축해졌다. 잠을 청하기보다 소리를 막기 위한 방어처럼, 나는 땀이 배는 이불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드르륵, 쿵쿵쿵. 결국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까지 꺼내 들었다.
“이제는 정말 안 들리겠지.” 잠시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다시, 드르륵… 쿵쿵쿵.
이불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생각했다. ‘지금 올라가서 말할까?’ ‘경비실에 민원을 넣을까?’ ‘아니면 메모지를 붙일까?’
밤은 생각으로 부풀었고, 머릿속은 이미 대화와 조심스러운 부탁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에는 상식을 벗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누가 알겠는가, 그 집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층간소음으로 칼부림이 났다는 뉴스를 들은 적도 있다. 혹시 내가 올라가 부탁이라도 했다가, 그 사람이 나를 위협하거나, 여자 혼자 산다는 걸 알고 해코지라도 한다면? 이런 상상이 밤마다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인 상상. 그 공포는 소음보다 더 크게, 더 오래 나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또 한 밤을 넘기며, 속으로 부동산 아저씨를 백 번쯤 원망하다 잠들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어느 날, 주차 문제로 관리사무소를 찾았고, 나는 오래 참아온 질문을 꺼냈다.
“504호에 혹시 신혼부부가 사시나요?” 소장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504호요? 그 집엔 할머니 한 분 혼자 사세요.”
“혼자… 사신다고요?” 나는 다시 되 물었다.
“네, 거동이 거동이 불편하실 때는 휠체어로 다니신다고 들었는데.”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동안 504호를 향해 품었던 감정들이 나를 민망하게 덮쳤다. 밤마다 들려오던 그 쿵쿵거림은 뜨밤의 흔적이 아니라, 노인의 휠체어 소리였다니.
그날 밤도 자정이 지나자 위층에서는 어김없이 그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쿵쿵쿵. 천장을 타고 끌고 다니는 그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이제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날따라 소리는 더 크게 들렸지만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지도, 헤드폰을 찾지도 않았다.
1년 동안 내가 짊어졌던 두려움은 서서히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다정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그 소리에 더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할머니,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치셨나요?’
이제 그 소리는 나를 잠 못 들게 하던 소리가 아니라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이 집에서 처음으로 깊은 잠이 들었다. 소리 위로 소리가 겹쳐진 밤,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그 밤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