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를 줄이기까지
음식을 사 먹지 않는 이유
엄마는 항상 불 앞에서 바쁘셨다. 태어나서부터 20년간 아토피가 있던 딸을 위해 매일 신선한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하셨기 때문이다. 새벽배송이니 오늘배송이니 그런 건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던 우리 집에서 장보기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이게 아토피에 좋대'
어릴 때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뭘까라고 한다면 이 대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느 날은 성인 상반신만 한 알로에 줄기 서너 개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어깨에 척 매고 거실로 들어오던 엄마를 신기하게 쳐다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마치 생 알로에를 매일 잘라 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쓱쓱 자르고서는 그 진액을 도려내 아토피 환부에 발라주셨다. 그 후로도 나는 알로에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엄마는 그런 걸 다 어디서 구해왔던 걸까?
볼, 귀, 목을 피와 진물, 각질로 뒤덮던 아토피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엄마는 더 이상 '이게 아토피에 좋대'를 안 하게 됐다. 20년간, 딸의 완치 가능 여부를 알 수 없는 질환을 위해 몸을 내던진 엄마의 헌신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1.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노력을 멈추지 않을 끈기
2. 좋은 식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습관
어릴 때 가족에게 배우는 것들은 돈 주고도 못 사는 신념과 습관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는다. 나는 그런 엄마가 나의 엄마임이 무한히 자랑스럽다.
8년 전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매일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갖게 된 나의 주방을, 오직 나의 선택으로만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나만의 작은 세계였다.
좋아하는 음식을 찾고, 더 맛있게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새로운 식재료 조합을 시도하면서 엄마가 그랬듯 꾸준히 '잘 차려 먹는 일'에 헌신했다. 좀 더 건강해지길 바라며, 좀 더 행복해지길 바라며 요리했다.
2019~2023
약 5년 동안 직접 요리한 음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내 이름에 들어가는 효 + live
= 온전히 나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hyolive라는 계정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에게 요리는 음식의 과함과 절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며, 나만의 ‘중도’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어렵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음식을 안 먹고 싶었고, 반대로 잘 맞는 음식을 꼭 찾고 싶었다. 긴 시간 가족의 보살핌을 받다 보니 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이 멋진 삶을 온전히 나로서 꾸려나가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계기들을 통해 아주 천천히 방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전, 면역과 영양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탄저지에서 저탄고지로
8년간의 장보기, 어떻게 바뀌었을까?
2018년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시장이나 마트에 직접 가서 주로 장을 봤다. 마트에서 파는 설탕 듬뿍 든 시리얼, 과자, 술, 음료수, 어묵, 아이스크림, 라면, 컵라면 (정말 좋아했다), 과일맛이 나는 요구르트 등 자연 그대로의 음식과는 거리가 먼 것들을 많이 사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고기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고기는 가끔 먹었고, 주로 해산물과 같은 저지방 단백질을 많이 먹었다. 나의 주 자연식은 쌀밥과 채소였다. 특히 밥을 정말 좋아했다.
2019년
이때부터는 유기농 어플로 장을 보면서 예전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식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품명에서부터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만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곡물빵이나 우리 쌀 디저트, 현미국수, 다이어트 도시락, 무방부제 소시지, 냉동 과일, 유기농 아이스크림, 우리밀로 튀긴 냉동식품, 각종 저당 소스 등 기존의 마트에서 사던 것들보다 성분이 더 좋으면서 가격도 합리적인 것들이 많아 정말 다양한 제품들을 먹어봤다. 이때 나의 냉장고와 주방은 온갖 주방용품, 양념, 식재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
2021년
끔찍했던 생리통에서 벗어나고자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전까지는 아토피처럼 참기만 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는 조금씩 마시던 술도 완전히 끊고, 내 몸에 잘 맞는 단백질원을 찾거나, 조금 더 깔끔한 소스를 샐러드에 뿌리고, 글루텐이 없는 면을 찾고, 가공식품이더라도 첨가물이 더 적은 걸 고르는 등의 추가적인 노력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2024년
본격적으로 식단을 시작한 건 24년도 1월쯤이었다. 나는 밀가루를 끊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정말 어렵고 오래 걸렸다. 장보기 목록에서 라면이 완전히 없어지기까지 1년이 걸렸다. 신기한 게 일주일에 한 번 먹던 라면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일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세 달에 한 번쯤으로 적응됐을 때쯤엔 점점 라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오히려 먹기 싫어지기도 했다. 습관은 정말 무섭다.
2025년
밀가루를 끊으면서 단 음식도 함께 끊기로 했다. 설탕이 든 대부분의 식품을 장보기 목록에서 서서히 줄여나갔다. 특히 나는 초콜릿에 대한 갈망이 강한 편이었는데 이때 과일의 단 맛을 많이 활용해서 버텼던 것 같다. 무가당 100% 코코아파우더에 바나나를 으깨서 아이스크림처럼 얼려 먹기도 했고, 귤을 갈아서 한천을 섞어 양갱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25년도는 본격적으로 장 치유 식단에 들어가면서 저탄고지 식단에 돌입하던 시기였다. 쌀을 제외한 어떠한 정제탄수화물도 사지 않았고 지방을 섭취할 수 있는 고기/생선/올리브오일을 평소보다 많이 사기 시작했다. 또한 내 몸에 잘 맞으면서, 함께 먹어 밥을 줄일 수 있는 채소들을 찾았다. 당근이 대표적이었다.
2026년
식재료를 딱 필요한 것만 사기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였다. 가장 큰 변화는 장 보는 시간이 정말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예전엔 새로 나온 신상품을 둘러보고, 후기를 확인하고, 온갖 가공식품의 성분표를 분석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는데 이제는 그렇게 스크롤을 내릴 일이 별로 없다. 또 장을 보고 나면 냉장고가 틈새하나 없이 꽉꽉 찼는데 이젠 여유가 많이 생겼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모든 식재료가 한눈에 보인다. 무엇을 가지고 요리를 해야 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먹어야 할 것들이 정확했다.
2년 전 자가면역질환을 진단받고, '장 건강'이 면역 질환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으면서부터 식단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장을 치유하는 식단들은 하나같이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식습관과 완전히 정 반대였다. 아토피나 면역 질환에 채식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의 식단은 30년 가까이 '고탄수저지방'식이였다. 하지만 면역 세포의 70%가 분포되어 있는 '장'에 부담이 가장 많은 식재료가 고기가 아닌 특정 채소와 곡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평생의 식습관 전체를 바꿔야 하는 기로에 서있게 됐다.
그렇게 주방을 치우고
습관처럼 주문하던 장보기 목록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보기 목록에서 지운 것들
1. 밀가루와 단 음식
2. 버터, 우유, 요구르트, 치즈, 양배추, 브로콜리
장 보는 목록을 어느 정도 정리한 건 작년 겨울 장 치유 식단 GAPS(갭스)를 시도한 후부터였다. 고기를 끓인 육수로 시작해 식재료를 하나씩 소량 도입하면서 진행하는 식단으로 아주 힘들었지만, 장을 치유하면서도 단계별 이유식처럼 내 몸에 안 맞는 식재료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갭스 식단으로 나는 평소에도 복부 팽만과 같은 불편감이 있었지만 좋아해서 쉽게 끊지 못했던 유제품과 십자화과 고포드맵 채소(장에서 잘 흡수되지 않고 발효되기 쉬운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 있는 채소)인 양배추와 브로콜리를 끊게 됐고, 이후 훨씬 피부트러블이 줄고, 속이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3. 모든 즉석, 가공 식품
4. 양념과 소스
장보기 목록
쌀 : 저탄고지 이후 계속 양을 줄이는 중
고정 채소 : 당근, 애호박
불규칙 추가 채소 : 고구마 감자 양파 상추 청경채 마늘
고정 단백질 : 계란 /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중 2가지를 로테이션으로
특별식 : 굴 (아연과 철분 섭취를 위해 생리 전에만)
고정 양념 : 올리브오일, 천일염, 후추, 유기농 토마토소스(토마토, 천일염만 들어간)
실온 보관 : 미역
장보기 목록을 대폭 줄인 지금도 음식을 먹을 때 항상 나의 컨디션을 살핀다. 특히 고기 중에 소고기, 채소 중엔 고구마가 속이 더부룩하거나 목에 이물감이 느껴질 때가 있어서 적은 빈도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선택지가 더 이상 경험이 아닌 피로로 다가왔을 때쯤 나는 삶을 간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진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글루텐프리 식품이나 저당 양념을 찾는 등의 얕은 노력이 아닌
본질적인 식이 개선을 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