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일기
졸리다. 잠은 왜 원할 때 오지 않는 걸까. 단지 잠이 많아서 내가 게으르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잠도 많고 게으르기도 하니까 저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잠이 많은 건 싫지 않다. 다만 게으른 건 조금 불편하다. 나는 나만의 속도대로 걷고 싶은데 세상이 너무 빠른 탓이다. 오늘도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불평해 본다. 잠은 오는데 시간은 간다. 성격이 급한데 게으르다니, 내가 누워있는 곳이 나태지옥이 아니면 어디가 나태지옥일까. 정말이지 농담 같은 인생이다.
나는 농담이 좋다. 실없이 히덕히덕 웃다가도 뒤통수를 빡 때리는 그런 농담들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준다. 종종 웃음을 넘어서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코미디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감탄만 나오는 농담은 별로다. 웃기지 않으면 그건 그냥 담이다. 진짜는 농에서 온다. 농익은 농담은 쿰쿰하다. 오래 숙성한 것들에서 나오는 바로 그런 감칠맛. 오래된 농담에 새로운 농담을 입히면 향신료 가득한 타코와 같이 그 깊은 맛에 빠질 수밖에 없다.
코미디를 사랑한 한 이가 한 말이 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나도 코미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농담으로 비극 같은 나의 인생을 희극인 것처럼 둔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이서 본 내 인생은 이렇다. 조용히 부모님 말만 들으며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뒤늦게 바람이 들어 대학교를 한 학기만에 휴학하고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딴짓을 맘껏 했다. 타투에, 피어싱에, 샛노란색으로 시작한 머리는 달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였으며,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차마 삭발은 참았고 짧은 스포츠머리로 알바를 전전하며 지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매일을 극한의 불안함과 행복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매 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연애였다. 뭐든 쉽게 싫증 냈던 내가 8년의 연애를 해냈고, 지금은 그 연애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는 내 인생 중에 가장 농담 같은 순간이다. 원래 웃음은 반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쁘다. 연인과의 믿음을 저버리고 이기적으로 굴었다. 헤어짐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가장 슬펐던 것은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8년간 연애한 나’도 좋았지만 더 늦기 전에 ‘혼자 비참하게 괴로워하는 나’ 역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비극이다. 배부른 소린 거 안다. 하지만 나도 내 맘을 모르겠는 걸~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섭섭함과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맘고생 했는지 아냐. 근데 너도 나 때문에 맘고생 심했잖아. 미안해. 더 좋은 사람 만나.
농담보다 가짜 같은, 농담만큼 진짜 같은 내 인생 최고의 비극이 끝나면 나는 또 다른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 다음 연애까지의 공백은 더한 비극일 거고, 새로운 연애는 더더 큰 비극일테다. 8년간 쌓아온 익숙함과 새로운 만남이 주는 이질감, 그 사이 허전함으로 가득 찬 공백기까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 밖에 없을 것 같다. 다 지난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과정은 아마 생존일터, 나는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겨우 한마디 농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