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편지가 버려지기 전에

BGM:김동률- 답장

by 실타래

안녕, 오빠.

답장이 너무 늦어버려서 미안.

삶이 퍽퍽한 날이면 꺼내보는 게 오빠가 써준 편지들인데 그 단정한 글씨들을 바라만 보다 이제는 정말 답장을 써야 할 때인 것 같아서. 잘 지내냐는 인사는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이 말에 기대어 보려고. 잘 지내?


네이버 N드라이브에 매년 n 년 전 그날의 사진을 보여주는 기능이 있어. 우리 사귈 때 사진 엄청 많이 찍었었잖아. 그게 핸드폰 사진첩에 뜨거든. 2년 전, 5년 전, 7년 전..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추억들이 매년 나를 다시 찾아와. 사진 속 오빠는 잘 지낸다는 듯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어. 오빠처럼 웃는 게 예쁜 사람은 드물잖아. 아직도 그 미소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나. 그 웃음 뒤에 있는 아픔을 처음 알아봐 준 사람이 나라서 나한테 관심이 생겼다고 했지? 흠- 그럼 나는 오빠가 왜 좋았을까.


첫사랑. 이 사랑스러운 단어를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오빠였어. 풋풋한 스무 살 첫 연애. 멋 모르는 동갑내기 친구들이 허우대만 멀쩡한 나쁜 남자들한테 데이고 고생할 때 난 오빠를 만나서 길게 안정적으로 연애했어. 맘고생 같은 거 한 적도 없지.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사람이 오빠였으니까. 가끔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도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았어. 보는 사람이 없는 새벽에도 횡단보도 신호를 꼭 지키는 사람. 길거리에 꽃을 절대 함부로 꺾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다해 함께 울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세상이 전부 나였을 땐 나도 정말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더라.


근데, 알잖아.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잖아.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지 말지 그랬어. 그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오빠의 마음을 시간이 지나 나도 오빠의 나이를 하나씩 겪으며 알게 됐어. 오빠도 나처럼 이 나이 땐 이만큼이나 알았을 텐데, 이런 고민들이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해줬던 거구나. 부모님의 사랑을 한참 뒤에야 깨닫듯 오빠의 마음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온전히 느껴지더라. 나한테 참 많은 걸 남기고 간 사람. 누군가 사랑의 정의를 물으면 난 오빠 이름 세 글자를 댈거야.


오빠는 날 위해 모든 걸 해줬어. 자기 자신보다도 내가 우선이었지. 한없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어. 근데 문제는 내가 그러질 못하겠더라. 소문난 모범생이던 사람이 권태기라는 내 말 한 마디에 평생 해 본 적 없는 탈색 머리에, 서클렌즈까지 끼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살면서 이런 사랑 두 번 다신 못 받겠다.' 동시에 '나는 이만큼의 사랑을 오빠한테 결코 줄 수 없겠다.'


그때 오빠를 놓아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건강하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한 사람만 만나다 결혼하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계속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렸어. 스스로 죄책감이 들어서 이별을 고할 때마다 오빠가 날 붙잡았잖아. 사실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그 벌, 나 지금까지도 받고 있다고 생각해. 사랑의 기준이 오빠가 되어서 웬만한 사람으로는 성에 안 차. 항상 오빠랑 비교하고, 결국은 오빠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해. 웃기지? 아직도 그런다는 게.


오해는 하지 말아 줘.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야. 후회하거나 붙잡고 싶었던 적은 없어. 우리는 너무 일찍 만났을 뿐이고, 나에겐 오빠가 과분한 사람이라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내게 힘이 되어주어서. 긴 시간 동안 오빠한테 받은 사랑이 아직도 내 맘 깊은 곳에서 나를 지탱해 줘. 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줘. 내 첫사랑이 오빠여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해. 이 말이 가장 하고 싶었는데 쓸데없는 얘기가 길었네.


결혼 축하해. 웨딩 사진 멋있더라. 오빠가 원하던 꿈도 이뤘다는 소식 들었어. 잘 될 줄 알았어. 아내분도 예쁘고 선한 인상이어서 마음이 놓였어. 오빠를 택했다면 분명 현명하신 분일 거야. 내가 뭐라고, 이런 거 다 오지랖인 거 알지만 정말 1%의 거짓도 없이 오빠의 행복을 빌어. 늘 그랬어. 아, 가족이랑 친구들도 같이 축하하고 있어. 전해지진 않겠지만.. 우리 둘이 싸우면 무조건 오빠 편 들던 사람들이잖아 ㅎㅎ 오빠가 좋은 남편이자 아빠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앞으론 나한테 준 사랑보다 더 큰 사랑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 이제 누군가의 남편이니 추억으로라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사진은 전부 지웠어. 이젠 정말 내 첫사랑을 보낼 때가 온 것 같네. 마음 깊은 한 부분을 이 편지와 함께 떼어내 볼게. 내게 사랑을 가르쳐줘서 고마웠어.


안녕, 오빠.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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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