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햇살과 모텔

BGM:DPR IAN- So Beautiful

by 실타래

낯선 곳에선 낯선 용기가 생기곤 한다. 외딴섬에 외딴 사람들과 섞여 술을 마시며 서담은 생각했다. 바닷바람도 선선하니 취기가 올라오는 게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맞은편 남자가 아까부터 자꾸 담을 힐끔 댄다. 귀엽네. 어려 보이는데.


"무슨 일 하시다 오셨어요?"

"내일은 어디 여행하세요?"

"근처에 괜찮은 맛집 몇 군데 아는데 저희 같이.."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이 스텝의 진행에 따라 마이크를 잡고 하나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에 자신이 없는 서담은 자신에게 굴러온 마이크를 엉겁결에 맞은편 남자에게 넘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마지못해 선곡을 하는데, 우연찮게도 담이 좋아하던 노래다. 기교 없이 담백한 목소리가 노래와 곧잘 어울린다. 매끄러운 노래 솜씨 때문이었을까? 술기운이었을까? 아님 여행이 선사한 마법이었을까. 담은 남자가 궁금해졌다.


아깐 떠넘겨서 죄송했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강현입니다. 너무 부끄럽네요.

되게 잘 부르시던데요~? 00쪽 게스트 하우스에서 일하고 계신댔죠. 저 다음 주에 그쪽 여행하려는데.

저희 게스트 하우스 놀러 오세요! 재밌게 해 드릴게요.

그럼 번호 좀 주시겠어요? 연락드릴게요.


1차 파티가 끝나고 술이 덜 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2차 장소를 논의할 때 담은 슬쩍 자리를 피한다. 낮 서핑의 여파로 피곤한 탓에 얼른 열기에 젖은 몸을 씻고 눕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하게 샤워 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제주 와선 연락 올 사람이 없을텐데, 액정을 보니 아까 그 남자다.


- 누나 오ㅙ 안 오세요. 저희 요 앞 바닷가에서 돗자리 깔고 2차 중이에요.

- 아.. 전 피곤해서 ㅎㅎ 재밌게 노세요!

- :(


몇 살인 줄 알고 누나래. 귀엽네. 담은 생각했다.



5월의 제주는 해가 일찍 뜬다. 어렴풋 흩날리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조깅을 하던 담의 눈에 해변 산책로 한 귀퉁이에서 담배를 피우는 강현이 보인다.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담배는. 모른 척 지나가려던 담의 발목을 현이 붙잡는다.


"굿모닝. 조깅 좋아하나 봐요?숙소가 근처에요?"

"아 걸렸네~그냥 지나갈랬는데. 해장하러 가는 길이에요?"

"아뇨. 어제 별로 안 마셨어요. 재미 없던데."

"문자 오타난 거 보고 취한 줄 알았는데.."

"저 술 세요~"

"그래요~? 근데 몇 살인 줄 알고 누나래."

"전 예쁘면 다 누나라서. 아침 아직이면 같이 먹어요, 누나."



"내가 누나라서 사야되는 건 아니죠?"

이들이 함께 한 첫 끼는 고기국수였다. 담은 강현이 정말 연하가 맞다는 것과 입사 전 잠시 삼촌을 도와 게스트 하우스 스텝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주 뒤엔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저는 몇 달간은 여기서 쭉 살 생각이에요. 집을 렌트해서. "

담의 말에 강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부지런히 봐야겠네요."


그 뒤로 둘이 함께 먹은 음식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둘은 3주를 꽉 채워 제주 곳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바다를 보고, 수영을 했다. 강현은 수영을 잘했다. 마치 한 마리의 돌고래 같이. 자신은 튜브 신세를 져야 하지만 담은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는 강현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제주의 낭만은 이들의 추억을 특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생에 다시 오기 힘들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강현이 서울로 떠나기 하루 전 날, 담은 그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1박을 했다. 그를 배웅해 주기 위해서였다. 4인실이지만 운 좋게 혼자 방을 썼던 그날 밤, 담은 강현을 방으로 불러냈다. 모기약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강현은 담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는 듯 모기약도 없는 빈손으로 와서 자연스레 담의 이부자리를 파고들었다. 그다음은 담의 입술을, 옷 속을 파고들었다.


그만.

담의 목소리에 풀린 눈의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강현이 물었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담은 누가봐도 꼴딱 밤을 샌 눈으로 자신의 옆에서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강현의 얼굴을 마주하곤 크게 웃어버렸다.



6월의 제주는 아침저녁으로 따사로운 햇살과 서늘한 바람이 공존했다. 대중 없이 피가 퍼붓기도 했다. 근처 서점에 들렀다 쫄딱 비를 맞고 돌아온 어느 금요일, 담은 집 앞에서 자신처럼 쫄딱 젖은 한 남자를 발견했다.

강현이었다.


금요일 밤 비행기로 왔어요. 내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거고요.

놀랐잖아. 연락이라도 하지. 짐이라도 챙기러 온 거야? 삼촌네는 이 동네 아니잖아.

보고 싶어서 왔어요. 못 한 말도 있고.


강현은 서울로 돌아간 후 한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여름밤의 꿈일 뿐이라고 담은 생각 했었다. 여행지에서의 일탈. 뭐 그런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을까. 아무 사이 아니었잖아. 그러던 차에 갑자기 나타난 강현의 앞에서 담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저 하루만 재워주면 안 돼요? 감기 걸릴 것 같아요.


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이 씻는 동안 차를 끓이고, 낮에 봐온 장거리로 국과 찬을 했다. 강현의 샤워소리와 창 밖의 빗소리, 찌개 끓는 소리가 섞여 점차 현실 감각을 무너뜨렸다. 아무렇지 않게 함께 밥을 먹고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는 동안 담의 시선은 강현의 캐리어에 꽂혔다. 열린 지퍼 틈으로 빼쭉 삐져나와있는 꽃송이가 눈에 띄었다. 밤톨처럼 짧아진 강현의 머리보다 그 꽃에 담긴 의미가 더 귀여울 거란 걸 알아서.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근데 저 서울 가서 누나 생각밖에 안 했어요.

무슨 생각?

안고 싶다는 생각.


캐리어에 고이 담겨 날라온 장미처럼 뜨거운 시선이 얽힌다. 담의 볼이 상기된다. 강현의 심장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그는 어리고 정열적이였으며 그런 강현을 막을 재량이 더 이상 담에겐 없었다.



서로를 품기에 이틀 밤은 너무나도 짧았다. 이틀 밤을 새우고 떠오르는 새벽녘의 햇살을 맞으며 담은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강현이 해주는 포근한 팔베개에 마음까지 폭닥해지려던 차에, 잠에서 깬 강현이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다.


매번 이러면 팔 아프지 않아?

아뇨. 평생 해줄 수 있는데.

열린 창 틈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담이 대답했다.

그래. 이제 그런 사이 하자, 우리.


한 달 후, 담은 제주살이를 정리하고 올라왔다. 공항에 마중 나온 강현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상해있었다. 강현은 신입이라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다. 다행히 서울에서도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주말이면 빠짐없이 데이트를 했다. 남들이 하는 그런 평범한 데이트였다고 그때의 담은 생각했다. 담은 연하와의 연애가 처음이었고 강현은 제대로 된 연애가 처음이었다. 강현은 서울에서도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담은 오랜 사회생활에서 쌓인 피로와 이별 후유증을 털어내기 위해 제주에 간 것이었고, 강현의 요구로 예정보다 빨리 서울로 올라온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강현만큼의 에너지나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얘기를 진득하게 못 나누고 시작한 관계여서였을까. 서울에서 둘은 유난히 자주 삐걱댔다. 걱정 없이 마냥 즐겁게 놀던 제주에서와 다르게 현실적인 문제가 계속 밟혔다. 사회 초년생인 강현이 아직 애 같은 소리를 할 때마다 담은 막막해졌다. 예컨대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 데이트 비용을 낸다던지, 툭하면 집에 안 들어가고 함께 밤을 보내자고 할 때 그랬다. 살아온 환경 또한 상이해서 말이 안 통할 때도 많았다. 제주가 아니였다면 평생 접점이 없었을 둘이었다. 로맨틱했던 제주에서와 다르게 담의 맘은 빠르게 저물어갔다. 한낮의 파란 제주 바당도 밤이 되면 새까맣게 식어버리듯 둘은 캄캄한 100일을 맞이했다.



근사한 식사를 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마지막 코스는 공원 산책이었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몇 달 전 이 시간엔 우리 나란히 앉아서 같이 바다 보고 있었는데.

애월이었나? 누나 어머님하고도 전화했잖아~

맞아. 우리 우도 가서 자전거 탄 것도 진짜 재밌었는데.

삼촌 따라 바다 낚시 한 것도 기억나? 누나 한 마리도 못 잡아서 엄청 짜증 내고 막.

ㅋㅋㅋ 그러게. 우리 그동안 참 좋은 추억 많았다, 그렇지?

응. 행복했어~

그러니까.. 강현아. 우리 아름다울 때.. 여기까지만 하자.


때마침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음에 강현의 답이 묻혔다. 담은 구태여 다시 묻지 않았다. 끝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마지막으로 술 한잔만 하자고 강현이 담담히 제안했다. 담은 미안한 마음에 거절하지 못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자 방금 한 이별이 무색하게 강현은 아무렇지 않게 담에게 스킨십을 했다. 손을 맞잡고, 볼을 간지럽히고, 입을 맞췄다.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담은 매몰차게 선을 긋지 못했고, 그게 화근이었다. 서울에서의 강현은 유독 어리광이 심했다.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법이 풀리듯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간 것일지도.


강현이 집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택시 타고 가.

아 싫어~ 택시비나 모텔비나 똑같아. 나 저기서 자고 갈 거야.

난 집에 갈 거야. 너랑 같이 못 있어.

왜! 시간 늦었는데 어딜 혼자 가려고 그래.

우리 헤어졌잖아. 왜 이러는데?

이렇게 가면 진짜 끝이니까! 나한테도 받아들일 시간을 좀 줘!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으며 담은 취한 강현을 끌고 모텔에 들어갔다. 그를 달래서 재우고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러나 침대에 누운 강현은 습관처럼 담의 몸을 탐하려 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기어이 무력으로 담의 옷을 벗겨낸 강현의 뺨을 담이 후려쳤다.

씨발...

너 지금 욕했어?

누나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 만난 거야? 그냥 잠깐 가지고 놀다 버리려고?

흥분하지 마. 우리 좋았던 시절까지 매도하지 말고.

그래, 사실 나도 누나랑 자고 싶어서 만났던 거야. 누나 예쁘고 몸매 좋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분위기에 취한 건 맞지만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니야.

아! 좆같네 진짜.. 그냥 마지막으로 나랑 한 번 해주면 안 돼? 우리 존나 잘 맞았잖아, 어?


사색이 되어 나가려는 담을 강현이 붙잡는다. 뿌리치고 발길질하는 그녀를 품 안에 가둔다.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미안해... 담이 바닥에 무너져 통곡한다. 강현도 쓰러지듯 침대에 앉는다. 우는 그녀를 더 이상 달래줄 수 없다. 퉁퉁 부은 눈의 담이 강현과 멀찍이 떨어져 침대에 눕는다. 강현이 뒤돌아 눕는다. 좀 진정되면 가. 지금 그 꼴로 나가는게 더 위험해.


담의 울먹임이 그치질 않는다. 잠이 안 와.. 팔베개해주면 안 돼?

강현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팔 아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담이 모텔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벽 햇살을 맞는다. 언젠가 이 햇살을 같이 본 것만 같은데.

옷가지를 주워입고 강현이 깨기 전에 조심스레 모텔 문을 나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담이 뒤돈다. 잠든 강현의 실루엣을 눈에 담는다. 그 한여름 밤, 우린 분위기에 취했던 걸까. 이게 우리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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