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늦었다. 부리나케 학교까지 뛰어간다. 복도를 지나는 것은 겁나지 않지만 정문과 엘리베이터를 지날 때는 차가운 적막감마저 감돈다. 교무실 CCTV로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후문과 계단으로 뛰어간다. ‘나’의 정보가 저장되어 기록되는 CCTV가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다. 사람의 기억보다 기계의 신호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가까스로 도착한 교실, 오늘의 업무를 지시받기 위해 컴퓨터를 켠다. 윈도우의 광활한 푸른 창,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라고 커서는 끊임없이 깜빡인다. 이어서 나오는 부팅 음악과 쏟아지는 메시지들, 옆 반 선생님과도 메시지로 대화한다. 직접 마주치면 업무 이외의 일들을 이야기하여 업무의 집중도가 흐려진다. 지시받은 메시지를 차곡차곡 정리하여 하루를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교육과정 제출일이다. 교육과정 작성을 위해 윈도우의 광활한 창에서 헤엄치고 있다. 어느덧 아이들이 다가와 말은 걸고 몇 명은 다투고 있다. 급한 마음에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너희들이 떠들면 선생님은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없단다. 교육과정은 타인이 우리반의 학급 경영을 열어보는 가장 중요한 자료야. 그러니 나의 교육과정 작성을 방해하면 안 돼.
수업종이 울린다. 교과서를 펴고, 사이트에 올려진 영상으로 수업을 한다. 연예인들이 미션을 수행하는 내용으로 수업이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역시 내가 설명해주는 것보다 연예인이 들어간 자료와 동영상은 가장 효과적인 수업 매체이다. 아이들은 동영상에 환호하였고, 연예인의 일그러진 표정에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나름 신나고 즐거운 수업을 했다고 만족해한다.
오후 시간, 갑자기 학부모의 언성 높은 전화가 걸려왔다. 수업을 마치고도 계속해서 윈도우의 푸르른 화면에서 헤엄을 치다 흠찍 놀란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서로 때리며 놀다가 슬프게도 우리 아이가 많이 맞았다며 어떻게 지도를 했는가라고 항의를 한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교장실 방문, 강제 전학 등 더한 것도 요구할 것이라고 하며 전화를 끊는다. ‘아이들이 장난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처리했네요. 시종 조치하겠습니다.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사과를 한다. 30명 학생 모두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은 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사과를 한다. 학부모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경고하며 전화를 끊는다.
집에 돌아와 다시 학부모의 항의 전화를 생각해 본다. 한순간에 선생님에서 고객으로부터 강력한 교환 환불을 요구받는 ‘나’를 생각하니 혼란스럽다. ‘나’라는 존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각해 본다. 먼저 교사로 연결한다. 연예인 동영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대부분이 할 수 있다. 그럼 업무 처리, 학급 경영 따위도 생각해 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부모의 항의가 전혀 얼토당토한 협박은 아닌 것이며 교사의 연결은 조금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를 작가로 연결한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교과서 사이에 책을 끼워 읽던 모습이 떠오른다. 책의 세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읽으면서 많이 행복했다고, 힘든 시기를 함께 해주어서 고마웠다고 그래서 나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을 한다. 그런데 순간 글쓰기의 어려움과 창작의 고통이 어깨를 짓누른다. ‘글을 쓰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어. 내 생각이 문자로 전환되어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야.’ 또 다시 혼란스럽다.
마지막으로 ‘나’를 가족으로 연결한다. 누군가의 딸이고 여동생이고 시누이고 고모이다. 다가올 어버이날에 구정 이후로 보지 못했던 가족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벌써 6개월의 세월이 지나갔음을 체감하게 된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며 중얼거리며 잊기 전에 어버이날 선물을 스마트폰으로 입금한다. 부모님 통장에 이름이 찍히니 부모 자식 간에 서로 확인도 되고 정말 편리한 시스템이다. 이 힘든 시기에 돈을 보내드리니 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진다. 어버이날에 만나면 다음 추석에나 딸, 여동생, 시누이, 고모의 이름으로 만날 것이다. 또 다섯 달이 지나야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된다. 그렇다면 가족으로 설명하는 것도 조금 곤란해 보인다. 또 혼란스럽다. 교사, 작가, 가족 중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중략
CCTV 기록이 두려워 사람들이 더 많이 지나다니는 정문과 계단을 이용하여 등교하며 안도해 한다. 학생들과 교감해야 하는 교사가 컴퓨터를 보는 시간이 더 길고, 가상 세계에서 학급을 경영하고 있다. 동료 교사와 만나 이야기하는 것보다 메신저로 만나는 것이 더욱 편하고 효율적이다. 분명 선생님이었는데 자기 아이가 피해를 보자 반품과 환불을 요구하듯 교사를 대한다. 작가가 되고 싶었고 책읽기는 즐거우나 글쓰기의 고통과 읽혀지는 것의 두려움을 호소한다. 통장계좌 이체로 직장인임을 확인하며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수 있음이 자랑스럽다. 6개월에 한 번씩 가족이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딸, 고모, 여동생, 시누이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과연 ‘나’일까. 물론 사실과 맞지 않게 과장된 내용도 있고, 기자와 같이 냉철하게 보도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의 시간이 중반대로 흐르는 ‘나’는 정체성과 가치관의 혼란이 오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 그러나 ‘나’도 누군가가 정확한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 명확한 해답이 나온다면 힘들게 허덕이며 살아가는 서로의 삶이 조금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덜어 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여전히 윈도우의 광활한 창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커서를 깜빡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