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하는 식감과 찰기가 어느 정도인가요?"
"부드럽고 쫀득하면서도 감칠맛이 강한 거요."
"그렇다면 이 품종을 추천해드릴게요. 최근에는 쌀 품종이 워낙 다양해져서 얼마든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밥맛을 구현할 수 있답니다."
노트북으로 재생시켜 놓은 미식 프로그램에서 밥맛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취방의 작은 접이식 밥상 위에 내가 먹는 밥이 있고 그들이 먹는 밥이 있다. 나는 마르고 퍽퍽한 밥을 씹으며 프로그램을 본다. 매일 먹는 밥인데 새삼스레 맛을 음미해본다.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고 한다. 그런 거 같기도 했다가, 어제 한 밥의 좋지 않은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아 이내 삼켜버렸다. 할머니가 농사지어 보내주신 쌀은 고향집에서 먹을 땐 윤기가 흐르고 찰진 밥이었는데, 서울에 와선 마르고 퍽퍽한 밥이 됐다. 밥솥 탓이다. 자취방의 손바닥만 한 2-3인용 밥솥은 집에 있는 고성능 압력 밥솥과 다르다. 어떤 좋은 쌀도 싸구려 밥맛으로 탈바꿈시키는 굉장한 능력이 있다.
요즘은 즉석밥이 워낙 잘 나와서 자취방 밥솥으로 지은 밥보단 그쪽이 훨씬 낫다. 대형 마트에서 개당 몇백 원이면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롭게 밥을 지어먹는다. 넉넉하지 못한 취업준비생 형편에 조금이나마 아끼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보내주신 쌀에 대한 부담과 죄송스러움이 더 크다. 어떻게 나에게 온 쌀인지 잘 알기에 버리거나 놀릴 수 없다. 물을 말아서라도 꾸역꾸역 맛없는 밥을 씹는다. 그래도 나에게 밥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에너지원만은 아니다. 방송을 보며 여유롭게 밥을 먹을 여유도 있고, 이래저래 요령을 피워 맛있게 먹을 궁리도 한다. 나에게 밥은 미식의 대상까진 아니지만 생(生)을 위한 끼니 이상의 존재다.
할머니에게 밥은 생을 위한 끼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밭일을 하다 점심에 집에 들르는 시간이 아까워 아침마다 간단히 싸는 도시락은 도시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모양새를 가졌다. 양철로 된 찬합에 대충 밥을 퍼담고 김치나 나물 같은 반찬을 두어 개 싼다. 밥의 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온도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할머니가 먹는 점심은 항상 찬밥이다. 어쩌다 내가 챙길 기회가 있어 반찬을 좀 더 넣을까 여쭤보면, 그런 거 먹을 정신이 어딨냐며 핀잔을 주곤 하셨다. 그 밥은 자신의 생도 아닌 자식들의 생을 위한 끼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편의점에서 막걸리 한 병을 훔치다 붙잡힌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나왔다. 생계가 어렵다면서 밥도 아닌 술을 훔쳤다는 사실에 일부 네티즌은 비난의 댓글을 달았다. 배고픈 그가 밥이 아닌 술을 훔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에게 밥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밥은 그에게 생을 위한 끼니, 그 보다도 더 절박한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끼 한 끼는 다음 끼니면 어김없이 찾아올 배고픔의 고통을 막기 위한 진통제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당장 도둑질을 해서 한 끼를 때워도 몇 시간 후면 고통은 다시 찾아오리라. 술은 차라리 더 지속시간이 긴 진통제였을지도 모른다. 배고픔뿐만이 아니라 훔친 음식을 욱여넣으며 찾아올 슬픔과 비참함 또한 잠시 잊게 해주었을 것이다.
쌀의 품종을 따져가며 밥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의 삶과 청년의 삶은 다르다. 그 간극은 나의 삶과 할머니의 삶과 또 다른 수많은 삶을 건너뛰어야 겨우 닿을 만한 간극이다. 그들의 밥과 청년의 밥은 다르다. 그들의 술과 청년의 술은 다르다. 술은 누군가에겐 여유과 즐거움, 사치일지 모르나 그에겐 가장 싼 값에 가장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진통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해하기에 청년의 밥은 너무 먼 곳에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