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화풍으로 인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강요배.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는 첫눈에 만난 대상을 단번에 매료시키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강요배가 달라졌다. 8월 26일부터 9월 30일까지 학고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첫눈에(At First Sight)> 출품작을 살펴보니 캔버스 속 감성과 섬세함이 예전보다 극대화된 것 같은 느낌이다. 강요배가 누구던가? 리얼리즘 회화와 역사 주제화를 통해 ‘우리나라 민중미술 1세대’라는 수식어를 얻은 화가가 아니던가. 그런 강요배의 거친 화풍은 작업 첫인상을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향한 저항의 외침으로 형성한 것이 사실이다.
강요배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제주 4·3사건이란 주제가 그동안 색안경을 끼고 그를 바라보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측하건대, 작업 표면에 드리운 내용이 강요배를 거칠고 불안한 인물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듯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식은 변했을지언정 태도는 그대로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온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학고재에서 오프라인 개인전을 개최하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제21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 전시를 열어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주는 떨림과 설렘은 없습니다. 준비하면서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아 대구미술관 전시가 끝나고 홀가분했건만, 얼마 전 다시 부담감이 생겼어요. 보통 1년에 20점 내외로 작업하는데, 제 스타일이 ‘짧고 굵게’입니다. 작은 붓 터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대신, 전시 구상을 어느 정도 마친 다음 속도를 내서 한꺼번에 그리는 편이죠. 80% 정도 완성됐다 싶으면 캔버스를 전부 뒤집어놔요. 한 가지 일만 하면 판단력이 흐려져 감성적으로 마비가 오거든요. 잠시 내려놓는 시간을 갖다가 잊을 때쯤 캔버스를 돌려 마무리 붓칠을 해요. 이때 작품을 과감히 제외하기도 합니다.
전시 제목 ‘첫눈에’가 굉장히 낭만적이에요.
보통 사물을 천천히 훑어보다 뭔가 눈에 딱 띌 때 이를 ‘첫눈에’라고 합니다. 발견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설명에 맞춰서 보는 것이 아닌 번뜩임이 일어난 순간을 종합적으로 헤아려보라는 의미예요. 직관적·감성적인 측면 모두 해당해요. 결국 바로 오늘까지 내 안에 쌓아온 것이 반응하는 것이니까. 사전 지식도 중요하지만, 제 그림을 너무 따지지 않고 봐줬으면 합니다.
순간의 풍경을 마음속에 저장하시나요? 아니면 사진으로 기록해두시나요?
그때의 소회를 메모했다가 작업할 때 꺼내봅니다. 제 작업은 세부적 형태나 색감보다는 전체적 감각을 중요시합니다. 덕분에 도구 사용도 자유로워요. 종이를 말아서 쓰기도 하고, 돌로 긁어내기도 하고. 기초를 다질 때는 붓이 도움이 되지만, 얌전하고 모범적이라 특별한 맛은 없어요.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 불립니다. 1980년대 초의 강요배와 2022년의 강요배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큰 차이점은 없어요. 이번 전시에선 첫눈에 들어온 풍경을 선보이지만, ‘이인성 미술상’ 수상 전시에선 대구 10월 항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어요. 비교하자면, 1980년대 초 강요배는 우리나라 시대상을 파고들었고, 2022년 강요배는 인생 공부와 마음 흐름에 더 집중합니다. 첫눈에 반한 대상을 그렸으나, 그 이면에 자리 잡은 그때의 감정에 귀 기울인다는 뜻이에요. 최근 작업을 보고 “당신 예술가 아니었어?”라고 묻는 사람들이 왕왕 있는데요, 그들은 여전히 제가 사회를 향해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기를 원하나 봅니다.
“나의 자아는 두 가닥 회로를 따라 교차하면서 자라난 듯하다. 자연과 우주, 사회와 역사로 향하는 두 가닥 회로. 그 둘이 바람 속에 얽혀 있듯이 그것들을 그림 속에 녹이고 싶다”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작가님에게 덧씌워진 ‘민중미술’이 조금은 불편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20대 때는 철학적 개념과 진리를, 30대 때는 사회와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다 40대 때 자연을 탐구했어요. 그러다 50대에 들어서니 심상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70대가 된 현재 목표는 핵심 내용만 드러나는 추상 표현을 완성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 점과 선을 지울 때 미련을 남기지 않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고백하건대, 강요배를 규정짓는 틀을 깨고자 했어요. 독재 정권 시기에 강렬한 예술 활동을 했다고 해서 이를 늙어 죽을 때까지 지속해야 할까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평생 25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민중미술은 100여 점입니다. 몇 개의 이미지로 나를 재단하고, 꼬리표를 붙이고, 해석이 끝났다고 본 거죠. 그래서 ‘민중미술 1세대’, ‘제주를 대표하는’ 등의 수식어가 와닿지 않습니다. 그저 시간의 리듬에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잡다한 일에 흥미를 느끼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런데도 제주 4·3사건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우리 기억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작가님이 하신 역할은 무엇일까요? 작가님 시각과 반대되는 관점도 존재하겠지요?
4·3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 다시 말해 문학, 미술, 영화 중 하나를 보여줬다는 것.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기에 충실히 공부하고 결과물을 제작했어요. 다만, 제 작업을 유일한 정답이자 진리로 보진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것은 다양하게 해석해야 해요. 대다수 작가가 사건 중심부에 있는 인물이라든지, 아주 예리한 정치 운동 같은 관점에서 4·3사건을 표현한 것과 달리 저는 보통의 삶, 그러니까 극히 일부에 시선을 돌렸어요. 혹자는 제 그림에 이념이 없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닐 법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니까요.
1990년대 초반과 비교할 때 2000년대 작업은 4·3사건이 캔버스 위에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이를 슬럼프라고 보는 시각도 있더군요.
앞서 말한 20~50대 사이의 변화와 일맥상통합니다. 관련 자료를 살펴보다 제주 자연에 다양한 역사 이야기가 겹쳐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자연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지독하게 집착하지 않으면 비극은 다룰 수 없습니다. 매일 죽음만 떠올린다고 상상해보세요.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요? 이를 특정 인물에게 계속 작업하라는 건 일종의 폭력과도 같습니다.
말씀하신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제주 출신 작가가 4·3사건을 이만큼 다뤘으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거든요. 1992년 서울살이를 접고 제주로 돌아갔습니다. 비밀이 있다면, 당시 4·3사건 작업을 제주에서 한 것으로 알 텐데, 사실 서울에서 완성한 거예요. 제주 대자연의 품에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자연스레 풍경 작업을 했어요. 한라산, 산방산, 성산일출봉 등의 절경 대신 골목길, 오솔길, 밭담처럼 제주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렸더니 신선하다는 평가가 돌아오더군요.
2018년 학고재 전시에선 1989~1992년 작품 50여 점과 1992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한 점씩 4·3사건을 떠올리며 제작한 작품 10여 점을 ‘동백꽃 지다’와 ‘동백 이후’로 나눠 선보였습니다. 2022년의 작가님에게 동백꽃이란 무엇인가요?
1998년, 2008년, 2018년 10년 주기로 학고재에서 4·3사건 전시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안 할 생각입니다. 4·3사건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데다 긍정적 재판 결과도 이어지고 있어 차근차근 나아질 거예요. 동백꽃은 ‘소생’을 상징합니다. 동백꽃이 졌다는 건 열매가 굵어졌다는 것이에요. 열매는 곧 떨어져서 나무로 커갈 테고요. 앞으로, 아니 이미 우리 다음 세대가 사회 주역이 됐습니다. 지는 것은 우리 세대가 충분히 했으니 미래엔 그들이 결실을 보길 바라는 염원이 동백꽃에 담겨 있어요.
무의식 중에 작가님은 거친 화풍만 보여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듯합니다. 최신작일수록 서정적 분위기가 짙어 인상적이에요. 그 근원이 궁금합니다.
‘나약함’이 아닐는지요. 예전의 거친 화풍 때문에 제 마음 상태가 거칠 것 같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약함을 감추고 보완하려 거칠게 그려왔어요. 제게 감성적 면이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젠 지나치게 열정적인 건 멀리하려고요. 인생의 나이테를 그려가면서 그림을 시적으로 표현하고픈 욕심이 생겼어요. 고요하고 맑은 날과 먹구름 낀 날이 일상을 이루는 것처럼 작업 기조도 다양하게 흘러갔으면 하고요. 이러한 내용을 반영한 작품이 ‘비천’(飛天, 2002)입니다. 한가하면서 호젓하지요?
벗어나려는 작가님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은 질문인데, 젊은 세대 작가들이 예전보다 역사적 사건을 덜 다루는 게 염려스럽진 않은가요?
전혀요.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그림 그리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에요. 그게 제일 어려워서 그렇지. 미술에 너무 많은 당위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미술로 무언가를 바꾸겠다 같은.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다면 밀실에서라도 혼자 그려야 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은 나중 문제입니다.
연장선에서,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예술, 예술 찾는 건 엄청난 사치다. 사는 것이 우선이다. 대신 예술은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림 파는 일에 몰두하는 건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팔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쉽지 않아요.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금세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아무 그림에나 금전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판매를 위해 예술적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비성, 우상화, 천재성 등을 너무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충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강요배가 정의하는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만인이 할 수 있는 마음공부. 그림은 나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에요. 시간이 흘러 이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 간섭 없이 그리는 행위 자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꼭 그림일 필요는 없어요. 문학도 좋고, 사진도 좋아요. 맹점은 글은 기교를 통해 나를 숨길 수 있고, 사진은 기계가 모든 과정에서 나를 대체한다는 것. 이와 비교할 때 그림은 온몸으로 하는 수행에 가깝습니다. 이런 까닭에 간혹 옷을 벗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덕분에 더욱 생생하게 나를 알 수 있어요. [2022.09]
강요배 1952년 제주 출생. 197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수학한 뒤 1982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민중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에 합류, 시대적 현실을 드러내는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작품 세계를 발전시켰다. 특히 제주 4·3사건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림으로써 역사 주제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작가는 제주 자연과 역사를 담은 회화를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