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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Oct 12. 2022

댄디 그리고 매디

이언경


“현대인들은 자주 길을 잃는다. 그러나 장소의 특질이 모두 사라지고 획일화된 (신)도시에서는 길을 잃어도 이내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는 길을 찾았으나 언제나 길을 잃은 것과 같다.”


<Giant> 출발선에 있는 이언경의 독백이다.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 등의 용어 아래, 한때는 당연하고 평범하던 것들이 구닥다리로 치부되는 작금의 세태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처음엔 그냥 걸었어.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네”라는 낭만 가득한 노랫말이 있었건만, 그때를 모조리 싹 다 갈아엎은 30년 후의 동네 한 바퀴는 흘러간 고작 약간의 시간조차 떠오르지 않아 감상에 젖게 된다. 최근 방문했던 신도시를 머릿속에 그려보시라. 분명 기시감이 들 정도로 모두 대동소이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언경을 사진작가의 길로 인도한 ‘에고 트립(ego trip,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경험)’의 지지체는 ‘두 발’이다. 작가 초년생 시절 사람이 궁금했던 이언경은 일상의 터전만 맴돌며 ‘나’에게 신경을 곤두세웠지만(<화장_변경 전: 가면>, <Karma>), 어느 순간 사람과 사진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선 길 위에서 삶을 음미하는 게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기점으로 첫걸음을 뗀, 부산-대구-베를린-화성을 잇는 작가의 여정은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말한 플라뇌르(flâneur)와 비견된다. 굳이 이번 전시에서의 비중을 따지자면, 도시를 감도는 멜랑콜리에 심취했던 보들레르보다는, 현실을 왜곡해서 보여주는 자본주의적 공간과 상품에 집중한 벤야민에 무게추가 쏠린다. 참고로 이언경이 독일 유학 시절 완성한 <Wege nach Libken>은 도시를 거닐며 경험한 우울함이 작가에게로 침잠되는 보들레르적 성향이 진하게 풍기는 작업이다.


일견 대립항으로 보이지만,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보들레르와 벤야민의 플라뇌르처럼 이언경의 <Giant> 역시 여기와 저기 사이를 오간다. 물리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으로 구분돼 있으나 둘을 넘나드는, 시작은 비판이었으나 종국엔 비판이 아니 되어버린 중용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벤야민에게는 19세기 파리의 파사주(passage)가, 이언경에게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작가는 경계를 표현하는 스테레오타입인 빈부의 병치를 사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보는 이 머릿속엔 이미 대도시의 낮과 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상정한 채 기묘한 혹은 어색한 장면을 제시한다. 메가시티로 변신할 공간에서 마주한, 담벼락에 붙어 있는 테이프의 흔적이 현대미술 패턴으로 보이는 것, 본디 세수와 세탁이 목적이었던 대야가 지금은 택배함과 튜브의 안식처로 탈바꿈한 것, 술집 문을 가로막은 냉장고가 SNS에서 자주 보이는 카페를 연상케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연장선에서 사진 곳곳에 작업 읽기에 힌트가 될 미미한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프레이밍한 점도 아기자기하다. 만약 작가가 기록과 정직한 재현에 초점을 맞췄다면, 보는 이는 응시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못했을 터. 만일 그러했다면 <Giant>는 작가 시선에만 머무른 피상적인 작업에 머물렀을 확률이 높다.



이와 같은 이언경의 사진적 태도는 ‘댄디’와 ‘도시 관상학자’ 성격이 짙다. 먼저, 댄디(dandy)는 겉모습에 치중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독창성을 이루고자 하는 열렬한 욕구’에 사로잡힌 형이상학적 인물이다. 댄디는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주변 환경을 샅샅이 탐색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정경을 찾아내는 것과 더불어 도시의 빠른 리듬에 저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도시 관상학자는 ‘도시 경험의 파편화와 현대적 기억상실증에 철저히 저항하는 인물’이다. 도시 관상학자의 특징은 과거의 것들을 수집해 현재를 꿰뚫어 보고 잠재성을 예측한다는 것. 비슷한 맥락으로 이언경은 스냅사진 형식으로 사라진 혹은 이내 사라질 것들을 채집하고, 이들을 엮어냄으로써 도시가 빚어낸 울림을 묘사한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자본주의에서 기인한 환상)에서 벗어나려 부르주아와 다른 길을 선택한 19세기 플라뇌르가 그러했듯 21세기 이언경도 구경꾼이 되지 않으려 신발 끈을 동여맨다.


이언경이 <Giant>를 구성한 방식을 보노라면 채집한 결과물들이 단디(단단하게, 촘촘하게) 엮여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되레 작가는 느슨한 매디(매듭)로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마치 보는 이에게 길을 잃으라고 종용하는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언경은 새삥이 아닌 실재하고 오래된 것들을 내세운다. 어쩌면 파편들의 조합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면에는 <Giant> 안을 유영하며 목격한 것들을 조합해 자신만의 도시를 상상해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숨어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렇게 탄생한 심상을 대도시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 여느 사회적 작업처럼 특정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플라뇌르는 양자택일보다는 탐닉과 비판을 통한 인식 확장에 의의를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오늘날 공간과 삶과 인간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으로, <Giant>의 독백 속 길을 잃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비결로 전치됐다고 할 수 있다. [202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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