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선
‘현존하는 세계 100대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첫 에세이를 출간했다. 그런데 스스로를 ‘좌절의 스페셜리스트’란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 국적 최초로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최연소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등 모두가 부러워하는 커리어를 지닌 그에게 실패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백혜선은 말한다. 성장이 있는 삶에는 좌절과 불안, 걱정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고.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로 문학계에 등단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미국 유학 초창기에 스승인 변화경 선생님이 앞으로 일기 쓸 일이 많을 거라며 일기장을 건네주셨어요.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는 그동안 써온 일기 중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사실 책을 쓰게 될줄은 몰랐어요. 제가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글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 하나를 하더라도 너의 정성을 담아서, 마찬가지로 연주에도 감동이 있어야지 매끈한 건 필요 없단다”라는 변화경 선생님 말씀이 늘 귓가에 맴돌아서.(웃음) 그래서 지금 굉장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도 큰 결심을 한 건 주변 사람들과의 이별 때문이에요. 2018년 오랜 시간 음악 인생 동반자였던 이명아 대표님이 돌아가셨고, 2021년에는 어머니와 이모, 동료 피아니스트 필립 케윈이 제 곁을 떠났어요. 그들에게 받은 헌신적 사랑과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 하루하루 소중함을 전하고 싶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변화경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출간 소식은 전하셨나요?
선생님의 글은 첫 줄만 읽어도 눈물이 흐를 만큼 감동적이에요. 언젠가 변 선생님께 러셀 셔먼 선생님(변화경 선생의 남편이자 백혜선의 스승)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어요. 그때 변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글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야”였습니다. 책이란 곧 무언가 영원히 남는다는 것과 같아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의미였죠. 며칠 전 선생님께 에세이 출간을 고백했는데, 일단 읽고 나서 야단치겠다고 하시더군요. 혼날 일만 남았어요.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1989),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1990)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1991) 입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1위 없는 3위(1994) 등을 통해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으셨어요. 성공 가도를 달려온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책 제목이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지나친 겸손 아닌가요?
예술가의 삶은 끝이 없다는 의미예요.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피아니스트는 좌절에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연주회를 위해 연습하고, 자신의 연주에 만족을 못 해 또 연습하고, 다음날 다시 연습하고. 피아니스트라는 꼬리표를 떼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커다란 고비뿐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작은 실망감도 좌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왜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인지 이해하겠더군요. 유년 시절 최윤정(수영 선수 최윤희 언니) 선수에게 수영 엘리트의 높은 벽을 실감한 일, 1993년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1차 실격 뒤 좌절감을 느끼고 전화 회사 영업직으로 취직한 일 등. 또 연주 활동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천재들도 만나셨을 테고요. 이러한 것들이 체념과 포기로 이어지지 않은 비결이 있다면?
지난해 임윤찬 씨가 역사상 최연소 우승을 기록한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를 예로 들면, 당시 “혜선 백이 떨어지면 이번 콩쿠르가 이상한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우승 후보로 꼽혔어요. 아뿔싸! 1차에서 떨어지다니, 충격 그 자체였죠. 지금까지 훌륭한 부모와 스승의 보살핌 아래 좋은 운으로 살아왔는데, 이젠 그 운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는 피아노를 치지 말라는 계시처럼 다가왔고요. 그래서 피아노와 전혀 상관없는 직장에 취업했어요. 의아하겠지만, 저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150%를 해내는 근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최고가 아니더라도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란 믿음도 있고요. 더욱이 내가 있는 분야에서 천재를 못 만난다면 재미없잖아요.
199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셨으니까요. (1974년 정명훈이 2위를 했지만, 당시 그는 미국 국적) 피아노와 상관없는 일을 하겠노라 다짐했던 마음이 바뀐 이유가 궁금합니다.
운명이라 쓰고, 변화경 선생님과의 인연이라 부를게요. 피아노를 그만두겠노라 선생님께 전화로 말씀드렸는데,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는 나가봐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1990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갔을 때 받은 러시아 관객의 무심한 눈빛이 떠올라 망설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이거 안 나가면 너 평생 후회한다”며 계속 설득하셨어요. 지원 마감일까지 버티다가 힘닿는 데까지 준비해보고, 떨어지면 진짜 피아노를 접겠다고 다짐했었죠.
그런데 오직 연주 하나만으로 환호를 끌어내셨어요. 그날의 전율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4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관객들 표정이 ‘네가 얼마나 하는지 보자’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연주를 했습니다. 2차 본선이 끝난 뒤 드디어 긍정적 반응이 왔어요. 꽃을 건네는 분도 있었고요. 하지만 작은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3차 결선을 앞두고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하는데, 호의적이지 않더라고요. 러시아 음악에 자부심이 있는 오케스트라가 동양 여자에게 쉬이 맞춰줄 의향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때 변화경 선생님이 템포를 조절하라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템포를 우선시한다는 걸 염두에 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진실한 연주는 결국 통할 것이라 되뇌며 무대에 올랐어요. 피아노를 치면서 조금씩 오케스트라와 교감하는 것을 느꼈어요.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이윽고 러시아 특유의 세 번씩 끊어지는 박수가 돌아왔습니다. ‘너는 우리와 같은 러시아인이야’라고 하는 듯했어요.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차이콥스키의 ‘사계’와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연주하셨습니다. 특히 리스트의 곡은 개인적으로 눅진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어요. 젊은 연주자의 기교와 유려함도 좋지만, 선생님 연주에는 그리움의 무게와 삶의 나이테가 담긴 것 같아 뭉클하더군요. 노년의 리스트가 열렬히 사랑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보는 느낌이랄까.
클라이맥스 때 열정을 표현하는 기교는 좋지만, 리스트의 곡이 모든 부분에서 재주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의 꿈’은 리스트가 독일 시인 헤르만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에 낭만을 더해 만든 음악이에요.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그대가 사랑하고 싶은 한’이라는 표현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삶은 영원하지 않으니 사랑을 끊임없이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주했어요.
간담회가 끝난 뒤 집에 있는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음반(1989)을 다시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선생님의 리스트 연주 역시 지금처럼 무게감이 있더군요. 스승인 러셀 셔먼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맞아요. 러셀 셔먼 선생님이 “연주자한테 연주 말고 필요한 것은 전부 다야! 자네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냥 그림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희미한 표현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라는 말씀도 하셨죠. 그러면서 생소한 영어 단어를 외우라고, 과학·그림·문학 등을 보고 에세이를 쓰라고 하셨어요. 이를 통해 인상(impression)은 언어를 보완하는 것일 뿐, 다양한 언어를 알아야 구체적 표현(연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리스트를 예로 들면, 기교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음악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은데요, 리스트는 삶에서 선과 악을 늘 고민하던 사람이었어요. 종교인으로 거듭날 정도로요. 그런 그의 삶이 단순한 피아노 음계로 묘사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학생의 아쉬운 점으로 ‘상상력 부재’를 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독서를 말씀하셨어요. 흥미롭게도 러셀 셔먼 선생님이 강조한 부분이 이제야 결실을 보는 것 같더군요. 그를 사사한 피아니스트 손민수의 제자 임윤찬이 단테의 <신곡>을 외울 정도로 읽은 점, 국내 예술대학에서 이론과 학술을 강조하기 시작한 점이 대표적 예죠. 이와 관련해 음악가를 꿈꾸는 자녀를 둔 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팁이 있다면?
어릴 땐 풍부했던 상상력이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줄어드는 게 눈에 보여요. 혼자만의 세계에 너무 빠지면 안 되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부모로서 걱정이 되겠죠. 저 역시 자녀를 둔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전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독서를 하라고 말해요.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뭔가를 그리게 되거든요. 이를 통해 상상력을 키울 수 있죠. 반면, 유튜브처럼 순간적으로 강렬한 자극을 주는 콘텐츠와는 거리를 두라고 합니다. 사색의 시간을 방해하니까요. 대중음악은 보통 3분 안에 끝나지만, 30~40분을 훌쩍 넘는 클래식 음악은 굉장한 집중이 필요하잖아요. 한 가지 더, 제 아이들이 받은 인상적인 교육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학교에서 자신이 정한 주제에 관해 다섯 줄 이내로 글을 쓰는 과제를 꾸준히 내주더라고요. 나만의 표현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위 질문의 연장선에서, 책에서 언급한 ‘연주자의 시각’과 ‘듣는 사람의 귀를 자극해 상상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무슨 관계일까요?
자신이 연주한 것을 들으면 잘 몰라요.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에요. 연주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무대예술은 음악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모든 부분을 관객에게 맞추라는 말은 아니에요. 나만의 것을 유지하면서 관객 반응에 따라 변화를 주는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더욱이 내 연주에 빠져도 어디가 과하고 어디가 부족한지 알 수 없죠. 제3의 귀(third ear)라는 말처럼 선생님이나 선배에게 피드백을 받는 게 중요합니다. 골프 선수에게 코치가 필요하듯이요.
선배 연주자로서, 교육자로서 최근 젊은 한국 연주자들의 활약을 어떻게 보시나요.
솔직히 무섭습니다. 매일매일 좌절이에요.(웃음) 천재만 연주해야 하는 시대가 왔나 봐요. 조성진과 임윤찬, 이젠 선생님 소리를 듣는 김선욱 등. 이들의 연주를 들으면 서로 비슷한 게 없더라고요. 더욱이 1980~1990년대 콩쿠르에 나가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는데, 최근 젊은 연주자들 덕분에 한국 클래식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어요. 심지어 요즘 국제 콩쿠르에선 한국 참가자들을 경계할 정도입니다.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이들은 정말 음악에 미쳐 있어요. 예전에는 기악과 정원의 70%가 졸업장을 위해 입학했는데, 요즘은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절반이 넘습니다. 당장 1등이 아닐지라도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으니까 연습 효과와 능률이 극대화되는 것 같습니다.
책 내용으로 돌아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의 일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연주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앞으로 연주자로서 어떤 활동이 예정되어 있나요?
절대로 경쟁이 안 돼요. 하지만 젊은 연주자들과 제 음악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을 때는 자신이 피아노를 얼마나 빨리 치는지 잘 몰라요. 시간이 흘러 성숙해져야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저도 그랬고요.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음반을 말씀하셨는데, 예전 음반을 들으면 숨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웃음) 젊은 연주자만의 감성이 있듯이, 저도 저만의 음악을 들려드리고자 해요. 좋은 책을 읽는 것처럼 가슴에 울림이 남는 연주, 머릿속에서 상상이 일어나는 연주랄까요. 이런 것들이 관객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으면 합니다. 향후 활동으로는 4월 11일 예술의전당 독주회가 예정되어 있어요.
예전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젊은 연주자들 덕분에 오늘날 클래식 음악을 향한 관심은 매우 뜨겁습니다. 반짝 인기가 아닌, 롱런을 위한 선생님만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당장 눈앞의 성과나 인기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넘어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을 꾸준히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젠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세상이잖아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슴에 울림을 주는 연주를 통해 관객들이 음악회에 오시도록 하는 것이 저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로서 또 선생으로서 연주자가 어떤 길을 가는지도 보여줘야 하고요.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끝나고 받은 질문을 활용해 마무리할게요. 지금까지 기쁨과 좌절의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안주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정차역 혹은 환승역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도전하셨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교육자·연주자의 종착역에 도달하겠지요. 훗날 마침표를 찍은 선생님은 뭘 하고 계실까요?
종착역은 없습니다. 비록 좌절이 있더라도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내가 돼야 하니까요. 책에 “정상과 비정상을 벗어나 연주자가(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성장이 있는 삶에는 좌절과 불안과 걱정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 (…) 안온한 일상에 가려진 내 삶의 무언가가 뻐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포착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정신적·육체적 건강이 허락되는 한 배움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강한 책임감이 생기네요. 젊은 연주자들에게 너무 호언장담한 건 아닌지.(웃음) [2023.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