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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un 11. 2020

수집의 기술

김달진, 최규성, 양해남

‘미술’의 이름으로 _ 김달진


우리나라 미술 자료 수집에 있어 김달진은 독보적인 존재다. 2015년 3월 홍지동에 새롭게 문을 연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서고도 모자라 그의 사무실 구석까지 자료가 쌓여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을 자랑한다. 또한, 그는 걸어 다니는 미술 백과사전이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를 빠삭하게 꿰고 있다. 전시 자료에서 틀린 정보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지적한다. 덕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한국 미술사의 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김달진 수집 여정은 중학교 때 시작되었다. 처음엔 껌 종이, 담뱃갑, 우표 등을 모았다. 그러다 미술에 관심을 두게 됐고, 자연스레 신문과 잡지 기사를 스크랩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제작한 서양 미술사 기반 스크랩북이 무려 10권이다. 그의 시선이 한국 미술로 향한 건 1972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현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고 나서다. 분명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한국 근현대 미술과 관련된 도록, 입장권, 팸플릿 등을 차곡차곡 모았다.



현재 우리나라 사진 잡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월간사진>과 <사진예술>이다.
<월간사진>은 1966년8월 전신인 <포토그라피>가 창간된 이래,
2020년 3월 기준 통권 626호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예술>은 1989년 5월 창간됐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진행한 <미술을 읽다>(~3.7)는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창간된 미술잡지와 별책부록 200여 점을 선별해 소개한 전시다. 인상적인 건 1917년 4월 창간된 <미술과 공예>다. 그동안 우리는 1921년 창간된 <서화협회 회보>가 한국 최초의 미술잡지로 알고 있었는데, 역사가 수정된 것이다. 하지만 <미술과 공예>는 일본인이 일본어로 편집한 잡지다. 한국에서 최초 발행된 것은 맞으나 역사성에서 보면 아쉬움이 크다. 반면, <서화협회 회보>는 우리나라 사람이 제작한 최초의 미술잡지다. 그의 수집품에는 사진잡지도 포함돼 있다. <월간사진> 전신인 <포토그라피>를 비롯해, 1956년 창간된 <사진문화>, <포토291>(1988), <포토넷>(1999) 같은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잡지가 있어서 이를 통해 시각예술의 역사, 더 나아가 당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김달진은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가 된다고 믿는다. 모으는 것을 넘어,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적 사실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에겐 딜레마가 하나 있다. 바로 ‘공간’ 문제다. 자료는 늘어가는데 보관할 곳이 부족하다. 국공립기관에서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다가 무산된 것이 부지기수다. 눈앞의 것만 생각하고, 소프트웨어 없이 하드웨어에만 집중한 결과다. 언제까지 미술계 자산을 구축하는 일을 개인에게만 맡길 것인가. 잘 정리해 후손에 넘겨준다는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수장이 바뀌면 백지화되는 것을 뛰어넘는, 국가적으로 지속 가능한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중의 욕망을 한데 모으다 _ 최규성


한때 대한민국 아이돌 역사를 집대성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적이 있다. ‘걸그룹 덕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중가요를 꿰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한 사내의 꿈을 산산조각 낸 책이 있었으니, 바로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의 <걸그룹의 조상들, 대중이 욕망하는 것들에 관한 흥미로운 보고서>(안나푸르나)다. 제목이 발칙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내용은 알차다. 1935년부터 1999년까지 등장한 한국 걸그룹의 역사를 담았다. 인터뷰와 사진, 사회상 등이 담겨 있어 걸그룹과 음악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추적할 수 있다. 그중 ‘요즘 걸그룹을 보며 “너무 야하다. 세상 말세”라고 비난하는 기성세대들의 시각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그들이 열광했던 1960~70년대 걸그룹은 미 8군 무대 영향으로 지금보다 더 성적인 매력을 풍겼기 때문이다.


최규성이 걸그룹 자료만 수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알아주는 음악 수집벽이다. 음반은 기본이다. 노래책, 팸플릿, 아이돌 관련 한정판 과자와 음료까지 모은다. ‘한국대중가요연구소’가 있는 파주의 아파트는 이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다. ‘걸그룹의 조상들’이란 주제는 빙산의 일각이다. 수집품을 토대로 ‘교과서에 수록된 대중가요’, ‘빽판(불법 복제)’ 같은 이야기를 무한정 뽑아낼 수 있다. 최규성의 수집 역사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에 충격을 받고, 음반을 모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가 군대 간 사이 아버지가 3천여 장의 음반을 버려 고비가 있었지만,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다시 수집에 몰두했다. 귀한 음반을 얻기 위해 술을 끊을 정도로 그 열정이 뜨겁다.



걸그룹(Girl Group)은 1993년 언론에서 처음 사용한 조어다. 이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결성한 그룹을 지칭하는 용어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시스터즈’ 혹은  
‘여성 그룹’으로 불렀다. 예전엔 어리거나 젊은 여성 가수의 집단적 구성을 일컬었지만, 이제는 ‘밝고 활기찬, 소녀다운 느낌을 가진 그룹’이나 ‘여성 댄스 그룹’을 통칭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 <걸그룹의 조상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대중가요를 천시하는 풍토가 있었지만, 최규성에게 한국 가수는 위로와 행복이 되어주었다. 그에게 뜨거운 추억을 남긴 앨범은 신중현의 첫 작편곡집인 송만수의 <베트남에서>다. 실물을 직접 보기 힘든 음반으로 현재 가격이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경매가 끝난 뒤 박수가 쏟아질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박인수의 <봄비>가 수록된 신중현의 퀘션스 앨범(1970)도 기억에 남는다. 20년 전엔 10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300만~500만 원에 거래된다. 이렇게 어렵고 치열한 과정을 거쳐야 함에도, 그는 즐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음반을 수집한다.


간혹, 수집이 의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전시 참여와 책을 출판할 때가 특히 그렇다. IMF 시절 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장품을 팔 때 일본 사람들이 황학동에서 신중현 앨범을 싹쓸이했던 적이 있다. 당시 최규성은 우리 것을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보관 문제가 제일 크다. 온도, 습도가 조절이 안 되면 음반이 상한다. 더욱이 자료는 계속 쌓이고 있다. 국공립기관에서 자료를 가져가겠다고 하지만, 대중가요를 연구하기 위한 체계적인 계획이 마련되기까진 그럴 생각이 없다. 최규성은 전시와 책을 본 사람들이 “몰랐던 사실을 알고, 가요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라는 말을 하면, 부담감이 사르르 녹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대중가요를 바라보는 공적인 시선이 달라지기 전까지 그는 불편함을 감수할 모양인 듯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1997년 등장한 SES나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걸그룹의 원조 혹은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9인조 걸그룹이 누구인지 물어보라. 숨도 쉬지 않고 ‘소녀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SES와 핑클이 한국 걸그룹의 원조라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대중에게 춤과 노래로 즐거움을 선사했던 그 많은 걸그룹들의 존재는 무엇일까. … 9인조가 넘는 걸그룹도 이미 해방 이후에 등장했고, 1962년에는 9인조 걸밴드까지 결성되었다. - <걸그룹의 조상들>


양해남이 수집한 영사기


시네마 키드의 생애 _ 양해남


1970년대 충청남도 금산에 살던 꼬마 아이의 유일한 벗은 영화였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미지가 어린 눈에 신기하게 다가왔으리라. 매일 추부에 있는 작은 극장에 출근하다시피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아이는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잡고 오늘의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머니 속 동전은 넉넉했지만, 한글 실력은 낙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혹, 그것도 모르면서 영화 보러 왔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으나, 덕분에 남들보다 한글은 빨리 깨우쳤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감독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꿈의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때 그 시절 우리가 그렸던 꿈은 차가운 현실의 벽을 쉬이 넘지 못한다는 것을.


이 이야기의 주인공 양해남은 시네마 키드였다. 비록 감독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영화와 함께하는 삶은 현재진행중이다. 그는 영화와 관련된 것들을 모은다. 16mm 영사기와 필름, 35mm 필름, 영화 소품 등을 수장고에 채워 넣었다. 백미는 ‘한국영화 포스터’다. 총 2,400여 장을 갖고 있다. 그중 1,500여 점이 희귀본(유일본)이다. 외국은 극장용과 수집용을 따로 제작하기도 하고, 수집 문화가 정착돼 오래된 영화임에도 포스터가 여러 장 존재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아마 벽과 전봇대, 다방 안을 전전하다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몇몇 영화 필름은 행방불명이다. 필름을 녹이면 은이 나오기에 어려웠던 시절 아무런 의식 없이 업자에게 팔았을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1926)이 있다. 원작은 물론이요, 리메이크한 영화의 필름도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구두약 원료로 사용됐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진 리메이크판 <아리랑>(1957) 포스터만이 현존 유일한 <아리랑> 관련 자료다.



1960년대 초반 황금기를 맞은 영화계는 제작 편수와 극장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영화 포스터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장이 있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들이  유입되어 다양한 표현 기법을 선보였다.
또한, 스틸 사진 촬영 기법과 인쇄 기기의 발달로 한층 자연스러운 색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유신정권의 통제를 받는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영화인들은 혼란스러웠고,
살아남으려는 방편으로 독재정권이 요구하는‘국책영화’라는 장르에 길들여진다. 부족한 자본으로 인해
영화사들은 새 영화를 제작하기보다 외화 수입과 정체불명의 합작영화에 열을 올렸다. 한국영화는
추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외국 영화를 모방한 디자인이 자주 눈에 띈다. - <영화의 얼굴>


양해남이 모든 영화 포스터를 수집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까지의 영화만 대상으로 한다. 21세기 전후로 제작된 영화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희소성이 떨어진다. 그가 포스터를 얻는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주로 극장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포스터를 갖고 있을 법한 사람을 수소문한다. 일이 잘 풀리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포스터에는 영화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이 녹아 있다. 데이트 필수 코스였던 영화, 윤전기에 의해 포스터 크기가 결정된 일, 외설 논란을 피하려 색을 덧칠한 일 등이 한 장의 포스터 안에 담겨 있다.


양해남이 직면한 문제 역시 ‘보관’이다. 공간도 부족하거니와, 시간이 흐른 탓에 종이가 부서지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그는 수집품을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과 즐기기 위해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연장선으로 <영화의 얼굴>(사계절), <은막의 스타>(눈빛) 같이 스틸사진과 포스터 등을 엮어 책을 냈고, 아카이브 전시에도 참여하고 있다. 양해남은 언젠가 수집품을 사회에 환원할 계획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이 담긴 그의 포스터를 앞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보존해야 할까. 수집의 기술을 미학으로 바꾸는 모멘텀을 곰곰이 생각해 볼 시점이다. [2020. 03]


1980년 전두환은 한국 영화계를 장악하고 통제했다. 무엇보다 검열에서 신체의 노출 수위를 파격적으로
허용했다. 그러자 성적인 묘사에 치중한 영화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현실 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정권 의도에 부끄럽게도 많은 영화인이 동참했다. 당시 영화 포스터를 살펴보면 선정적인 제목과 카피,
이미지들이 가득해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다. 자연히 포스터 디자인에서도 예술적 감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웠고, 인쇄 수준도 형편 없었다.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며 한국영화 포스터는 큰 전환기를 맞는다.
스틸 컷에 의존한 디자인에서 벗어나, 전문 사진작가가 별도로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프로 디자이너가 작업하는 포스터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김중만, 변승우, 최준관 등은 독자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표현했다. - <영화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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