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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un 11. 2020

보이는 기록, 보이지 않는 기억

‘너랑 나’로 이뤄진 연분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형’을 이룰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관계에서 기인한 단방향 ‘기억상실증’은 일일 드라마에서나 다룰 법한 소재로 전락하게 될까. 귓가엔 ‘기록하지 않아도 내가 널 전부 기억할 테니까’라는 노랫말이 맴돌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리 로맨틱하지 않은 듯하다. 일례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학교폭력 의혹이 있다. 골자는 미디어에 노출된 유명인(가해자)의 성공한 혹은 행복한 삶은 본 피해자가 나락 같았던 예전 기억이 떠올라 온라인 플랫폼에 과거 폭력 일화를 공개하는 것. 여리박빙(如履薄氷)으로 몇몇 가해자는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유년 시절의 자신을 미화하기까지 한다. 피해자는 기억해도,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했던가. 이를 대변하는 건, 폭로 직후 올라오는 ‘사실 여부를 떠나,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등이 쓰인 가해자의 사과 글일 테다. 마치 피해자 혼자 타임슬립하는 모양새인데,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일단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것이 대응의 정석인가 보다.



북한군 포로들, 『Bert Hardy : My Life』(1985), Gordon Fraser(London), 스캔본


기록(구술, 사진)을 기점으로 하는 학교폭력에 대한 견해차를 심층분석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는, ‘기록과 기억의 관계’를 생각해보자는 것이 이곳에서의 목표라면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중심에 사진이 있다. 1839년 ‘다게레오타입’이 발표된 이후 사진은 역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지금이야 사진 속 총천연색 풍경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단조로운 흑백 필름에 기록되지 않았던가. 여기서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흑백으로 표현된 역사의 한 장면이 그때의 현장을 오롯이 담아냈다고 할 수 있을까?’, ‘혹, 세상을 뒤흔들었던 흑백사진 속 사방으로 흩날리던 핏방울이 실제로는 꽃잎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기억을 갖고 어떤 오늘을 살고 있었을까?’가 바로 그것이다.


기록과 기억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3년 봄, 버트 하디(Bert Hardy)의 한국전쟁 사진을 접하면서부터다. 보도사진 잡지 <픽처 포스트(Picture Post)>가 가장 사랑하는 사진가였던 버트 하디는 영국 빈민가와 폐허가 된 거리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7년 전 이맘때쯤, 그가 찍은 ‘북한군 포로들(North Korean Prisoners)’에 마음이 동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옆에는 ‘1950년대 부산역 밖, 국군과 UN군이 북한군 포로들에게 야만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남북의 대립과 갈등을 떠나, 사진 속 인물의 국적을 떠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함과 공포가 드리워진 얼굴 때문에, 비록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 수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사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픽처 포스트> 게재를 위한 레이아웃까지 준비했지만, 편집장 톰 홉킨슨(Tom Hopkinson)이 망설였던 탓이다. 톰 홉킨슨은 사진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실성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사진이 널리 퍼지면, UN 군과의 마찰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얼마 후 런던에 돌아온 버트 하디가 “이 사진은 조작하지 않았다.”라고 밝혔으나, 그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시민들의 표정, 『Bert Hardy : My Life』(1985), Gordon Fraser(London), 스캔본


언젠가 ‘북한군 포로들’을 놓고, 역사를 공부하는 유럽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사진은 무조건 ‘슬픔과 비극’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에게는 이 사진이 신비롭게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진을 보며 연신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었다. 돌아온 대답은 “지금은 볼 수 없는 시대의 인물과 풍경이 아름답고 신기하게 다가온다.”라는 것. 그들에게는 전쟁의 참혹함이 아닌, 흘러간 시간의 한 부분을 사진 한 장에 담아냈다는 점이 우선시되는 가치였던 셈이다.


버트 하디가 찍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시민들의 표정’도 인상적이다. 처음 사진과 마주했을 때 눈에 띈 건 노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이후 보인 것은 저 멀리 손을 들고 걸어오는 아낙네와 아이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자유를 얻은 기쁨일까, 아니면 새로운 권력에 보내는 항복의 몸짓일까. 더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정말 진실일지 짚어보고 싶어졌다. 교육으로 각인된 한국전쟁 통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는, 교과서 속 사진들이 단편적인 장면들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 버트 하디의 사진을 보며,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선(善)이 절대선이 아님’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던 게 사실이다. 하나의 사건도 여러 시각에서 접근하면 유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속사정을 만날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는 게 일종의 부채의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2013년 4월 런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에서 열린 버트 하디 전시


지금까지 기록과 기억상실, 기록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살펴보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록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적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나’의 기억을 장담할 수 없거니와, 기록 생산자와 사용자의 견해가 매번 일치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얼마 전 특정 세력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옹호해 논란이 됐던 책, 넓은 맥락에서의 ‘집단기억’과 ‘리플리 증후군’ 등이 이와 궤를 같이할 것이다. 기록이 기억을 잠식한 것인지, 기억에 따라 기록이 선별된 것인지, 비판적으로 양쪽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록과 기억’ 측면에서 더 주의해야 하는 건 ‘기억의 재생산’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는 ‘아카이브 열병’을 앓고 있다. 전문 기관과 연구자는 기본이요, 온라인 기반의 아마추어 아키비스트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기록의 채택, 평가, 배열’이라는 전통적 임무와 달리, 아마추어 아키비스트는 일단 모으고 본다. 그리고 논쟁거리가 등장하면, 그에 걸맞은 데이터를 끄집어내 철학을 만든 다음, 논쟁에 이용한다. 문제는 이들이 온라인 셀럽이 됐을 때다. 클릭과 터치 한 번이면, 재가공된 데이터가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공식적’ 성격을 띤 기록물도 우리 기억에 작용하는데, 하물며 전문 기관, 연구자보다 파급력이 센 인물의 기록물은 어떠하겠는가. 또한, 잘못된 정보로 구성된 기록물이 온라인에 박제되면, 이것이 잊힐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데이터이즘(Data-ism, 사회 현상을 통찰하는 데이터를 숭배)’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자칫하다가는 ‘아카이브+디지털 전체주의’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처음으로 돌아가, 기록과 기억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다. 사진과 활자를 통해 기록을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늘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해야 나의 기록이 독자의 선입견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모순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어찌 됐든, 기록은 생산자의 일정 기준에 따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무리 생산자가 힘을 덜어낸다 한들, 권위를 가진 사용자의 해석에 따라 기록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던가. 게다가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기록이 기형적으로 변할 확률도 높다. 궁금하다. 변질될 우려가 없는, 다시 말해 기록이 그저 기록으로만 남을 수 있는 ‘시간의 바깥’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기록 생산자와 사용자가 맺은 관계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를 유지해야 할까. 기실 이보다 중요한 건, 그래서 선행돼야 하는 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찰나에 모든 것이 노출되고 저장되는 시기, 단방향 기억 주입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archives.seoul.go.kr/posts/megazine


서울기록원 브랜드 북 '아카이브 서울'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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