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김지혜의 작품 속 인물들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오픈리 퀴어(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공개한 성 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김지혜는 자신을 ‘논 바이너리’로 정체화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촬영한 뒤 이를 아카이빙하고 있다.
영국 팝가수 샘 스미스(Sam Smith)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논 바이너리(Non-binary)’라는 용어를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지난 3월, 배우 자밀라 자밀(Jameela Jamil)의 인스타그램 쇼에서 그는 “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그 중간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캐나다 퀸스 대학(Queen’s University) 조교수 리 에어턴(Lee Airton)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곳에 논 바이너리가 함께하고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먼저, 젠더와 관련된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자. 인권·법률 공동체 ‘두런두런(Do Learn Do Run)’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는 지정된 성별과 자신의 젠더가 다른 사람을 말하고, ‘논 바이너리’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젠더를 의미한다. 그리고 ‘젠더퀴어(Genderqueer)’는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현재 한국에선 ‘논 바이너리’와 ‘젠더퀴어’가 비슷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논 바이너리’는 정체성의 ‘엄브렐라 텀(Umbrella term, 여러 정체성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에 해당되고, ‘젠더퀴어’는 기존의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고자 하는 개인적 선언에 가깝다. 한편, <뜻밖의 여행: 여행자 종합책자>는 ‘논 바이너리’를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며 만들어진 용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성별 이분법’이란 이 세상에 남자 또는 여자만 존재하고, 사람은 반드시 둘 중 하나의 성별만 가져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체계를 가리킨다. 이 체계 안에선 에이젠더(Agender, 어떠한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 즉 젠더가 없음), 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성 정체성이 고정적이지 않고 상황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함) 같은 젠더가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종합하자면, ‘논 바이너리’는 성별 이분법이 포괄할 수 없는 성별 정체성을 아우르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인 셈이다.
김지혜의 작업은 ‘비(非)-시스젠더(Cisgender)’인 자신의 정체성에서 시작한다(*시스젠더: 지정된 성별과 실제 자신의 젠더가 일치하는 사람). 청소년기 김지혜는 자신이 바이섹슈얼(Bisexual, 자신과 같은 젠더는 물론 다른 젠더 모두에 성적 끌림을 느끼는 성적 지향성)이라고 믿었다. 또한, 거울로 보는 자신의 몸이 생경하게 다가왔고, 여성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되는 역할에 막연한 거부감도 들었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문화인류학을 비롯해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했다. 그때부터 김지혜는 자신을 ‘논 바이너리’라고 인식했다.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니 디스포리아(젠더 정체성이 지정 성별과 다른 데서 오는 위화감)가 적어졌고, 자연스레 마음도 편안해졌다. 비록, 남녀로 구분된 공중화장실 같은 현실적인 부분에선 예전보다 어려움을 더 겪게 됐지만 말이다.
‘논 바이너리’ 작업의 핵심은 ‘치유’와 ‘공감’이다. 김지혜에게 집은 보수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이다. 식사 준비나 결혼 같은 여성의 성 역할이 중시되는 자신의 집을 촬영 장소로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곳에서 ‘논 바이너리’의 몸을 보여준다면, 집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사회적 통념에 균열을 내겠다는 의지도 담았다. 작업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비-시스젠더를 가시화하고, 그들의 존재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다. 실제로 ‘동등한 인권’을 주장하는 퀴어 내에서도 비-시스젠더를 향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퀴어 예술만 하더라도 작가 대부분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은가. 이러한 비-시스젠더의 삶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김지혜의 작업이다.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까닭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래서 차별과 혐오를 경험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시스젠더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작은 반향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물론, 기존의 모든 것을 뒤집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바람을 녹여냈을 뿐이다. 이는 사진만 봐도 알아챌 수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기준만 들이대지 않는다면, 사진 속 주인공들은 시스젠더와 다를 것이 없다. 아니, 그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엄격한 잣대와 저울의 눈금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19. 09]
김지혜 ‘김우주먼지’라는 활동명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지워지는 존재들을 직관적인 시선으로 담는 것에 매력을 느끼며, ‘오픈리 퀴어(스스로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공개한 성 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자신의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