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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ul 10. 2020

찢어 붙이는 재미

비디 그라프트, 하비에르 마틴, 야스민 황

콜라주는 종이에 나뭇잎, 인쇄물, 천 등을 붙여서 구성하는 미술 기법을 가리킨다. 콜라주하면 ‘초현실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현실 저 너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로 사용된 것이 콜라주 아니던가. 하지만 최근 전시장을 수놓은 콜라주 작업을 보니, 그동안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과거보다 굉장히 감각적인 기법으로 표현됐지만, 명징하게 직조한 덕분에 작가의 현실적인 메시지를 보다 편히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Crowd 84.1x118.9cm 2019
(왼쪽) turtle-10.1x14.4cm (오른쪽) Taxi3-23.5x30cm


예술(가)에게 바치는 옐로카드

B.D. Graft


감각적으로 오려낸 노란색 종이가 시선을 잡아끄는 작업과 마주하다 보니, 어느새 발걸음이 아트숍 쪽으로 향하고 있다. 절대로 현혹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감각적인 굿즈를 쓸어 담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현재 뮤트뮤즈 팝업 전시장(서울숲6길 19)에선 패션 브랜드와 젊은 예술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비디 그라프트(B.D. Graft)의 전시 <The Art of Yellow>가 진행 중이다.


비디 그라프트는 “Is it mine if I add somee yllow?(노란색을 더하면 내 작품이 되는가)”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예술작업의 주체와 소유권에 대한 논의를 유도하는 작업을 한다. 오래된 책의 한 페이지, 사진, 그리고 엽서 등에 마티스(Matisse)를 연상케 하는 형상의 노란 종이를 덧입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원작이 무엇인지 숨기지 않는다. 현대미술 방식으로 재탄생했지만, 온전히 나만의 예술이 아닌, 원작과의 협업으로 탄생했음을 명시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비디 그라프트가 피카소 작품에 노란색을 더했다면, 이는 피카소 예술에 자신만의 현대적인 해석을 담은 것이지, “피카소, 당신 작품은 내 거야.”라고 선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오마주, 음악으로 치자

면 샘플링, SNS 관점에선 리포스팅인 셈이다. 콜라주 작업은 우연히 시작됐다. 직접 종이를 오리고 붙이다가 그 매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자연스레 현대미술의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노란색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과 열정의 빨강, 우울과 멜랑콜리의 검정과는 달리, 노란색은 중립적이다.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제격이다.


펑키한 겉모습과 달리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깨알 같은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익명의 군중 사진에서 얼굴 부분을 칼로 도려낸 것을 보면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하고, 활자를 가려버린 손때 묻은 종이를 통해선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가장 통쾌(?)한 작업은 히틀러의 자서전 <Mein Kampf(나의 투쟁)>를 이용한 것이다. 당대 작가들의 작품을 ‘퇴폐 미술’로 낙인찍었던 히틀러에게 경고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마치 더는 이런 종류의 증오와 편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이처럼 예술의 주체와 소유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넘어, 과거 예술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비디 그라프트의 노란색 물결은 7월 31일까지 계속된다.



Blindness
(왼쪽) Blindness Yuan (오른쪽) Famous Cut_Andy Warhol


눈을 본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Javier Martin


하비에르 마틴(Javier Martin)의 전시 <Blindness(보이지 않는)>가 열리고 있는 서울미술관에 들어서면, 처음엔 다소 어지러운 것이 사실이다. 첫 번째 섹션 ‘Blindness Collection’이 너무나 휘황찬란하기 때문이다. 동공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곱씹을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상업적인 광고의 언어를 빌려 시각적으로 완벽한 이미지를 분해함으로써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비에르 마틴은 회화, 콜라주, 조각,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등 여러 가지 매체를 시도하며 예술적 실험을 이어온 작가다. 일상 속 오브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조, 질감, 형태를 깊이 탐구하고, 이를 활용해 사회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을 시각적인 은유로 재구성해낸다. 작업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먼저, 종이나 나무 팔레트 위에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속 여성의 사진을 인쇄한다. 이후 흑백 계열의 물감을 칠해 화려한 배경을 삭제하고, 형형색색의 네온을 이용해 인물의 눈을 가린다. 의도적으로 가린 눈은 현대사회의 기술과 소비가 빚어낸 사회적인 ‘맹목’을 상징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비에르 마틴은 작업을 통해 외모와 물질 같은 피상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비판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던 내재적이고 고유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첫 번째 섹션으로 돌아가 본다. “눈을 본다. 눈을 본다. 빠져든다. 빠져든다.”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반사되는 네온사인 불빛으로 인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잠깐의 적응기를 지나서야 여성의 눈앞에 네온사인이 설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이내 여성의 형체가 사라진다. 네온사인의 밝은 빛에 반응한 눈이 상대적으로 어두운 여성의 이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화려함에 현혹돼 본질을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고취하는 듯하다. 두 번째 섹션 ‘Blindness Yuan’은 전통적인 콜라주에 가까운 작업으로 구성된다. 네온사인으로 눈을 가리는 대신, 중국과 홍콩 화폐로 모델의 몸을 감싼 것이 인상적이다. 아름다움과 자본을 상징하는 드레스를 남성적 그림이 그려진 화폐로 치환해 여성의 신체를 부각함으로써 돈과 아름다움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듯하다. 세 번째 섹션 ‘Famous Cut’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에서 눈과 뺨, 이마를 제거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머릿속에 그들의 이미지가 각인된 탓이다. 유명한 인물 혹은 물질의 외적인 것만 기억하고, 소비하는 현대사회를 꼬집는 것 같다.


하비에르 마틴의 작업은 실험정신이 돋보이긴 하지만, 구조와 형식이 단순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순식간에 휘발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전시장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네온사인 빛이 눈에 잔상으로 남아 작업에 대한 여운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반복 효과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 <Blindness>는 7월 28일까지 진행된다.



<May 2018>


금지하던 것을 과연 금지했을까?

Yasmine Huang


시위를 하는 군중 속에 다소 이질적인 여성 모델이 섞여 있다. 국내에서 개봉됐던 영화 <1987>을 마치 서양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처럼 느껴진다. 야스민 황의 콜라주 작업을 보고 있자니, 흥미롭게도 격동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1980년대 치곤 너무 세련돼 보이는 주인공(김태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록 흑백이지만, 이미지의 본질은 패션 광고인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야스민이 차용한 것은 ‘프랑스 68혁명’을 재현한 구찌(Gucci)의 2018 프리폴(Pre-fall) 캠페인이다. ‘자유(liberté), 평등(egalité), 성(sexualité)’을 내세우며,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쳤던 1968년 5월의 프랑스 대학생들을 재현한 구찌 광고는 패션이 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닌, 삶의 철학을 표현하는 매체임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정말 구찌는 ‘반란, 용기, 자유’로 점철되는 ‘프랑스 68혁명’의 정신이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와 부합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구찌가 놓친 부분이 하나 있으니, 바로 ‘68혁명’이 후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던 ‘68혁명’이 명품을 선호하는 소비주의의 홍보 매개체로 사용됐다는 뜻이다. 학생들이 천만 원이 넘는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학생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보다는, 시대정신을 이용해 젊은이들의 구매를 자극하는 모양새다. 이 지점에 야스민 황의 <May 2018>이 있다. 얼핏 보면 급진적이고 과격할 것 같지만, 실상은 평화적(?)이다. 이는 진보적인 생각이 더 이상 자본주의 체제를 온전히 전복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대신 그녀는 명품, 더 나아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온화한 방식의 시위인 셈이다. 콜라주를 이용한 건 그 기원이 다다이즘에 있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은 ‘1920년대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전위적인 예술인들이 자발성, 불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기존 체계와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문화 운동’이다. 구찌와는 달리, 시대정신을 반영해 선택한 작업 방식이다. 본질적으로 ‘반항’이 근간인 콜라주를 선택한 것은 필연 아닌 필연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야스민 황의 전시 <Paradise>(5.4~6.5)가 열렸다. 전시에서 그녀는 <May 2018>을 비롯해 파격적인 컬러 콜라주 작업인 <Contemporary Circus>도 선보였다. 이 역시 후기 자본주의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작업이다. 사이버 세계의 시각적 파편들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소비 행동에 내재한 모순을 들춰내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들은 키치적이었지만, 적절하게 직조된 덕분에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201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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