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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7. 2020

내 작업실을 소개합니다

이광기, Our Labour, 박동준x박형렬

모든 것의 발단은 ‘그놈의 술’이었다. 전시 오프닝에서 “이제 어디로 갈까요?”란 질문에 답했던 “작업실에서 음악 들으면서 수다 떨어요.”라는 말이 나비효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초가을 살랑거리는 바람과 기분 좋은 취기, 여기에 무드 있는 조명과 달달한 음악이 더해지니 작업실이 살롱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 황홀한 시간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아 있는 그때 그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며, 운김 가득하다고 소문난 작업실 열 곳을 찾아갔다.




올 댓 파주 _ 이광기


‘끼스튜디오’는 생화와 조화를 이용해 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사진가이자 배우 이광기의 파주 작업실이다.



끼를 발산하라

예전엔 찍히는 배우였지만, 지금은 찍는 사진가로 그리고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인 이광기. 그는 지난 여름, 파주에 근사한 작업실을 완공했다. 넓은 부지에 ‘ㄱ’자 모양으로 설계된 것이 인상적인 ‘끼 스튜디오’는 블랙 컬러로 마감된, 밖에서 보면 모던한 감각의 창고처럼 보인다. 1층에는 스튜디오가, 2층에는 작업실이 있는 독특한 구조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이 작업실에 ‘예술의 기쁨’이 충만하길 원했다. 또한, 끼 없는 사람들도 이곳을 왔다 가면 끼 넘치는 사람으로 변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각종 촬영 소품과 그가 그동안 수집한 다양한 작품, 빈티지 TV와 가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현재 이광기는 ‘끼 스튜디오’를 갤러리와 렌탈 스튜디오, 소규모 강연장, 그리고 개인 작업실로 활용하고 있다.



파주, 남북 문화교류의 허브

이광기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접경 지역이다. 그는 DMZ를 촬영하기 위해 작업실 겸 스튜디오를 파주에 오픈했다. 이유는 뛰어난 접근성 때문이었다. 출판 단지로 유명한 파주지만, 얼마 전부터 이곳의 출판·인쇄산업은 시대 흐름으로 인해 큰 부침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광기는 파주가 머지않아 뉴욕 첼시에 버금가는 문화·예술도시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본 파주는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였고, 예술가와 인문학, 아름다운 건축물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인쇄산업이 빠져나간 이 공간에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출판 단지에 영상 단지도 조성됐다. 덕분에 파주가 남북 문화교류의 허브가 될 것이라는, 그로 인해 통일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최근 그의 작업은 DMZ에 자생하는 식물들을 채취해 스튜디오로 가져와 호리존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단이라는 역사의 산 증거인 식물이 평화의 교두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왼쪽) 문형태의 작업이다. / (오른쪽) 기는 데 급급한 최신 모델과 달리, 조작 다이얼을 모두 밖으로 꺼내놓은 빈티지 텔레비전
(왼쪽)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의 웜체어 / (오른쪽) 이상용 작가의 조각


젊은 작가와의 교류

‘끼스튜디오’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많다. 공간 곳곳에 그림과 설치작품, 의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갤러리를 연상시킬 정도다. 예전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드라마 <태조 왕건> 이후 경제적·심리적 여유가 생기면서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주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수집한다. 2007년 문형태와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당시 문형태는 신인에 가까웠는데, 미술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때 이후로 작품을 구매하게 됐다고 한다. 그 이후 작업실도 함께 사용했으며, 여전히 미술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끼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첫 번째 전시도 문형태와 하태임의 2인전이다. 

인스타그램(@lee_kwang_gi)




삼선동 만남의 광장 _ 이정형, 정기훈, 최병석 그리고 오용택


설치 기반의 미술 작업을 하는 이정형, 정기훈, 최병석과 변호사 오용택이 뭉쳤다. 생뚱맞게 보이는 이들의 조합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삼선동 ‘Our Labour’다.


왼쪽부터 최병석, 이정형, 오용택 그리고 정기훈                                


노동집약적 유희

삼선동 ‘늘벗다리’를 건너 하늘을 향해 나 있는, 조금은 복잡한 길을 걷다 보면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오른쪽으로는 세월을 잔뜩 머금은 무채색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제는 흔하디흔한 재개발 지역처럼 변해가는 이곳에 이정형과 정기훈, 최병석 그리고 오용택의 작업실 ‘Our Labour’가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작업실이 있다. ‘먼지 유무’에 따라 작업실을 구분한다. 다소 정적인 작업을 할 때는 1번 작업실을, 나무를 깎는다거나 다양한 공구를 이용한 번잡스러운 작업을 할 때는 2번 작업실을 사용한다. 평범한 건물 외관과는 달리,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 내부는 전혀 딴 세상이다. 미드에서 볼 법한 천재 과학자의 연구실 같기도,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소목장의 공방 같기도 하다. 삼선동의 매력은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동네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비록 사소할지라도 30분 안에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변에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이 거주하고 있어 경계 없는 문화·예술적 교류가 가능하다. 더욱이 가까운 거리에 청계천이 있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재료를 구할 수 있다. 이정형과 정기훈, 최병석에게 작업실은 노동집약적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이들은 작업실에서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반면, 오용택에게 작업실은 ‘먼지 많은 디즈니랜드’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취미 활동을 통해 현실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손재주가 좋은 최병석의 작업 테이블 / (오른쪽) 최병석이 제작한 커피 메이커. 인스턴트커피 스틱에서 커피만 따로 추출해 볶는 것이 핵심이다.


Our Labour의 처음

이정형과 오유미, 장준호가 대학교 재학 시절 미술 관련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시작됐다. 노동(전시장 설치 같은)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이후 장준호가 작업실을 옮기며 생긴 빈자리에 정기훈과 최병석, 오용택이 합류하면서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됐다. 이정형은 설치작업을 통해 미술관(갤러리)이라는 환경 안에서 전시되는 예술작업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정기훈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를 설치나 오브제를 통해 풀어내며, 최병석은 손의 감각에 집중한 입체작업을 한다. 의아한 건 변호사 오용택의 존재. 이정형과의 우연한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져 작업실에 합류하게 됐다. 평일에는 법전을, 주말에는 목공을 즐기고 있다. 일손이 부족하면, 세 명의 부름을 받고 작업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다.


나무를 깎는다거나 다양한 공구를 이용한 번잡스러운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2번 작업실
2번 작업실에 있는 공구들


우리는 동료

작가와 변호사로 살아가는 개성 넘치는 네 명이 모여 있는 ‘Our Labour’에는 희로애락 담은 다양한 사연들이 혼재돼 있다. 이정형과 최병석은 “각자 작업의 결이 다르지만, 작가라는 삶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작업실에 나오는 발걸음이 경쾌하다.”라고 말한다. 도예를 전공한 정기훈은 “다양한 재료들을 다루는 작가들을 만나면서 사고와 작업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서로는 기쁨과 자극을 주는 존재이자, 작가로서 묵묵하게 공력을 쌓아가는,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인고의 시간을 함께 이겨내는 든든한 동료인 셈이다. 한편, 작가들에게 오용택은 ‘정신적 지주’다. 작업실 공기가 너무 치열하게 느껴지면, 한 템포 쉴 수 있는 여유와 재미를 선사한다. 때로는 비평가 역할도 한다. 오용택은 미술 애호가 수준을 넘어선 까다로운 감식안을 가진 변호사다. 그가 가끔 툭툭 내뱉는 담백하지만 날카로운 말 덕분에 세 명의 작가들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스타그램(@our_labour)


(왼쪽) 식물을 키울 때 사용하는 램프를 이용한 정기훈의 작업 / (오른쪽) 오용택이 사용하는 대패




펑키 아날로그 _ 박형렬 x 박동준


모더니즘의 이상이 담겨 있는 을지로 세운상가 건너편에 모더니즘 잔재에 저항하는 박형렬과 박동준의 작업실이 있다.


박동준(왼쪽)과 박형렬(오른쪽)


을지로 바이브

더 이상 낙후된 동네가 아닌, ‘힙플레이스’로 통하는 을지로 인쇄골목에 박형렬과 박동준의 작업실이 있다.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건물 외관만 보면 이곳에 작업실이 있을까 싶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비밀스러운 장소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하는 건 아날로그 소품과 사이버틱한 조명이 만들어낸 펑키한 분위기다. 노동 기반의 아날로그 사진 작업을 하는 박형렬과 사진에 기반을 둔 뉴미디어 작업을 하는 박동준의 크로스가 빚어낸 대조적이면서 묘한 조화다. 서울예대와 한예종 동문인 이들은 처음엔 약수와 이태원, 필동에서 작업실 공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최종 종착지는 을지로였다. 정해진 예산 내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도 있지만, 충무로와 청계천이 근처에 있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작업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공간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작업실을 구할 당시 을지로에 젊은 층이 유입돼 ‘핫’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무엇보다 ‘날’ 것의 나이브함, 을지로가 가진 구조와 역사, 전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별도의 미팅룸이 없어 동료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해보는 것이 어렵고, 건물이 오래돼 전기 공급이 수월하지 않을 때도 있다.


작업실 문 앞에 붙어 있는 ‘프루이트-이고(Pruitt-Igoe)’의 붕괴 순간 이미지                                


STUDIO 267, 모더니즘의 종말

작업실 이름은 ‘STUDIO 267’. 267은 주소의 번지수를 의미한다. 입구에 대한 첫인상은 꽤나 강렬하다. 문 앞에 모더니즘의 종말을 상징하는, ‘프루이트-이고(Pruitt-Igoe)’의 붕괴 순간 이미지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도시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모더니즘 잔재들을 향한 저항의 표시다. 이들 작업의 기본 토대는 ‘모더니즘의 종말’이다.

박형렬과 박동준 모두 올해 열린 전시를 이곳에서 준비했다. 박형렬은 작업실에서 다양한 소재를 테스트한 덕분에, 이번에 처음 시도한 설치작업 중심의 전시인 <Drooping Layer>를 완성도 있게 마칠 수 있었다. 박동준 역시 을지로에서 볼 수 있는 소품을 이용한 전시 <을지디멘션>에서 원색 조명과 손때 묻은 공산품이 가진 묘한 느낌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왼쪽) VR을 이용하는 박동준의 ‘잇 아이템’ HTC VIVE / (오른쪽) 박형렬이 작업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동료 그리고 조언자

박형렬에게 박동준은 ‘삶의 동료’다. 비록 동생이지만, 작업과 일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민과 문제를 언제든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박동준이 의젓하기 때문이다. 한편, 박동준에게 박형렬은 ‘이퀄라이저’ 같은 존재다. 가끔 작업과 일상의 균형이 어긋날 때가 있는데, 이때 그를 다잡아주는 역할을 박형렬이 한다. 작업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조언자다. 각자 작업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틈날 때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에서 파생된 것들에 대해 탐구하고 공유한다.

www.parkdongjoon.com / 인스타그램(@jakka_park)

www.bakhr.com / 인스타그램(@bakhyongryol_work)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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