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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Aug 17. 2020

내 작업실을 소개합니다

정희승, 구본창, 김규식x현홍


모든 것의 발단은 ‘그놈의 술’이었다. 전시 오프닝에서 “이제 어디로 갈까요?”란 질문에 답했던 “작업실에서 음악 들으면서 수다 떨어요.”라는 말이 나비효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초가을 살랑거리는 바람과 기분 좋은 취기, 여기에 무드 있는 조명과 달달한 음악이 더해지니 작업실이 살롱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 황홀한 시간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아 있는 그때 그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며, 운김 가득하다고 소문난 작업실 열 곳을 찾아갔다.




날 닮은 너 _ 정희승


‘대상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의미를 탐구’하는 사진가 정희승의 목동 작업실.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정갈한 공간

주택가가 밀집한 목동 골목 한편에 있지만, 한눈에 이곳이 정희승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 작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컬러인 벽돌색과 짙은 회색은 물론이요, 군더더기 없는 선과 면이 작업실 외관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른편에 햇빛 머금은 중정이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찌나 고요한지 발걸음을 사뿐히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중정 맞은편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면 작업실이 있는 3층에 다다른다. 처음 마주한 공간이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다. 이곳 역시 정희승 작업처럼 정갈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작업실이 지어지기 전 이 자리에는 남편이 어렸을 적 살았던 오래된 단독주택이 있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가 한동안 그곳을 작업실로 이용했다. 하지만 너무 낡았던 탓에 가족이 함께 살 수 없었고, 그래서 새로이 집을 짓게 됐다. 2층은 가족의 보금자리로, 3층은 작업실로 설계했다. 주택가 깊숙한 곳에 위치한지라 창문을 닫으면 외부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작업실의 가장 큰 장점인 듯하다. 창문을 활짝 열었음에도 들리는 건 기껏해야 골목길을 활보하는 아이들과 새들의 재잘거림이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작업에 안성맞춤인 환경이다. 오후로 넘어갈 즈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도 인상적이다.


페리지 갤러리  전시 때 책을 올려놓았던 나무판(왼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있을 때 직접 만든 육각형 나무 테이블(오른쪽)
정희승의 <부적절한 은유들>(왼쪽)과 양정화 작가의 목탄 드로잉(오른쪽)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공간

예전 작업실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두운 환경이 그녀에게 정서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예전 작업을 보면 극도의 긴장감과 무게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Still Life>, <부적절한 은유들>이 예전 작업실에서 탄생했다. 정희승은 그때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나를 몰랐으면 했다. 내 자신을 은폐하려고 했고, 작업에 내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 했다. 강박적으로 사진만 찍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작업실 환경이 달라지면서, 작업의 결도 달라졌다. <부드러운 단추>, <Rose is a rose is a rose>를 보면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사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밝고 넓은 공간에 있으니 여성으로, 아이의 엄마로, 작가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깊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새로운 막을 올릴 수 있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정희승은 직접 테스트를 하고, 프린트를 한다.


일상이 곧 예술

정희승 작업실을 수놓고 있는 건 다양한 소품들이다. 희한하게도 그녀가 소품들을 어루만지기만 하면, 이들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이상한 케미를 발산한다. 일상의 풍경이 그대로 예술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심플한 나무 테이블이다. 하나는 페리지 갤러리 <Rose is a rose is a rose> 전시 때 책을 올려놓았던 나무판이고, 다른 하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있을 때 직접 제작한 육각형 나무 테이블이다. 그저 그 위에 몇 개의 물건을 올려놓았을 뿐인데 스타일리시함 그 자체다. 또한, 액자 앞에 무심하게 놓인 공구와 나뭇잎, 카메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스틸라이프를 만들어낸다. 이와 함께 책장에는 쉬이 접할 수 없는 도록들이 꽂혀 있다. 책들 사이에는 딸이 만든 반려묘 호두의 석고상이 마치 책장 주인인 양 자리 잡고 있다. 귀한 책을 보려거든, 자신의 허락을 받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한쪽 공간엔 대형 프린터도 있다. 그녀는 작업실에서 테스트를 하고, 프린트를 한다. 벽면에 붙어있는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니 둘만의 비밀을 공유한 것 같아 뿌듯하다. 공간 이곳저곳에서 정희승과 사진, 그리고 공간이 서로 참 많이 닮아있음을 느낀다. 아무래도 작가와 작업실은 운명적 필연인가 보다.


(왼쪽) 딸이 방학숙제로 만든 반려묘 호두 석고상 / (오른쪽) 네덜란드 작가 단 반 골덴(Daan van Golden)의 도록





수집의 미학 _ 구본창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가 중 한 명인 구본창. 분당 첫 번째 작업실에 이어 뒤편에 새로 개관한 아틀리에 ‘Studio 9’에선 그의 수집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지나간 시간

성남아트센터 뒷산과 연결된 숲 방향으로 나 있는 좁은 길 중간에 구본창의 작업실이 있다. 꽤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 하는지라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각오해야만 한다. 2년 전 이맘때 이곳을 방문했었는데, 그 사이 주변 경관이 참 많이 변했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구본창의 분당 첫 번째 작업실(본관) 뒤편으로 새로운 아틀리에(신관)가 생겼다는 것. 스튜디오와 암실이 있는 본관은 실질적인 사진 작업을 하는 곳이며, 신관은 각종 자료를 아카이빙 한 곳이다. 신관은 총 네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1층은 작품과 자료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지상 1층은 손님과 함께 사진을 볼 수 있는 소규모 갤러리로, 2층은 소장품 가득한 서재와 응접실로, 그리고 3층은 풍경을 보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휴식처로 꾸몄다. 각층을 잇는 계단 벽면에는 구본창의 지나간 시간을 개괄하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본관과는 달리 신관은 작품 운반을 위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며, 작품이 햇빛에 상하지 않도록 유리창을 작게 냈다. 심플한 노출 콘크리트 구조지만,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책과 소장품을 비추는 모습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비누’와 ‘백자’를 감돌던 공기의 온도와 참 많이 닮았다.


<비누> 시리즈 오브제들. 처음의 색과 모양을 갖고 있진 않지만, 흘러간 시간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숨> 시리즈에 등장한 론진(Longines) 시계. 1994년, 스페인 여행을 하던 중 벼룩시장에서 구입했다.


이곳은 보물창고

구본창의 첫 번째 작업실은 아차산 근처에 있었다.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리노베이션 해준 공간이었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았던 이곳에서 그는 ‘생명의 덧없음’을 이야기한 <굿바이 파라다이스>와 임종을 맞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찍은 <숨> 시리즈를 제작했다. 2000년 구본창은 작업실을 분당으로 옮겼다. 사진 작업과 자료 보관을 위한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넓어짐에 따라 사유의 시간도 늘어났다. ‘미니멀리즘의 정수’라 불리는 <화이트> 시리즈가 첫 번째 작업실(본관)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그동안 작업했던 것과 수집했던 물건 등을 정리해서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기획된 신관이 완공됐다.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집부터 그가 나왔던 기사들, 여행 중 벼룩시장에서 구매했던 앤티크 한 소품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색 바랜 작은 의자, 옛날 엽서,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거장들의 사진집 등이 여전히 잔상에 남아있다. 현재 구본창은 신관을 개관한 뒤 ‘황금’과 ‘청화백자’, ‘탈북자’ 작업 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거장들의 사진집을 볼 수 있는 서재
(왼쪽) 인사동 앤티크 가게에서 발견한 엽서 / (오른쪽) 지하 1층 앞에 있는 작은 중정


우아한 백조의 물갈퀴

구본창의 사진 작업은 차분하지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작업실은 그리 차분하지 않다. 작업실을 동분서주하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작업 구상을 위해 방대한 양의 리서치를 해야 하고, 오랜 사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구체화되면 사진을 촬영해야 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아이디어 회의도 해야 한다. 우아한 백조의 물갈퀴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그래서일까. 구본창의 작업실 이름은 ‘Studio 9’이다. 자신의 이름 중 하나인 ‘구’를 이용한 것도 있지만, 맥시멈을 뜻하는 숫자가 9인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Studio 9’에서 그는 가장 높은 예술적 성취를 위해 오늘도 불광불급(不狂不及)하고 있다. 

www.bckoo.com




아날로그 실험실 _ 김규식 x 현홍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기반으로 하는 전시 브랜드 ‘Kim & Hong’의 작업실 ‘Kim & Hong Laboratory’는 파주 출판 단지에 있다. 아날로그 카메라와 암실 장비, 깨알 같은 소품들을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김규식(왼쪽) & 현홍(오른쪽)


이상한 지역의 멀쩡한 실험실

사진가 김규식과 현홍의 작업실은 파주 출판 단지에 있다. 사실 작업실의 외관만 보면 평범한 회사 건물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건물 2층에 올라가 작업실 문을 열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건 아날로그 카메라와 암실 장비, 조명, 특이한 소품들이다. ‘Kim & Hong Laboratory’는 사진 매체를 실험하기 위해 김규식과 현홍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인 ‘Kim & Hong’의 작업실이다. 2008년 신한갤러리에서 열린 그룹전 <흑백을 묻다>에 함께 참여한 뒤, 흑백사진 작업을 하는 동시대 사진가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흑백사진에 대한 고정관념(예를 들어, 전통 다큐멘터리만이 진정한 사진이라는)을 깨보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작업을 하게 됐다. 2014년 문을 연 이 작업실은 칸막이가 없는 열린 공간으로 스튜디오 촬영을 할 수 있는 흰색 배경과 조명, 아날로그 카메라, 암실 장비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덕분에 사진 매체 연구와 실험, 촬영, 현상, 인화 이 모든 것을 한 장소에서 할 수 있다.


작업실 정중앙에는 다용도 탁구대가 있다. 큰 사이즈의 작품을 펼쳐볼 때나, 두 개로 나누어 각자 작업을 위한 테이블로 사용하기도 한다. 가끔 탁구를 치기도 한다.


따로 또 같이

작업실을 같이 사용하지만, 특이하게도 작업 관련해서는 서로 주제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Kim & Hong’ 전시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들은 매년 한 차례, 각자의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한 공간에서 전시할 뿐이다. 작업실을 사용하는 것도 독특하다. 칸막이가 없기에 둘이서 동시에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한 사람이 암실 작업을 시작하면, 다른 한 사람은 불을 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업실은 철저한 로테이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아날로그 프린트는 롤지 사이즈까지 가능하다. 확대기를 작업실 중앙으로 끌고 와 눕힌 다음, 벽에 붙인 인화지에 이미지를 투영하는 방식이다.


(왼쪽) 현홍의 린호프 ‘Technikardan’ 4x5 카메라 / (오른쪽) 두 사람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책상


예술적인 성취

김규식에게 작업실은 ‘노동의 공간’이다. 작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김규식은 “작업실을 내고 싶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 낭만적으로 들리진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작업실이란 직장인에게 사무실과 같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일을 하러 온다는 태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편, 현홍에게 작업실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매번 크고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는 것이 어렵기에 이곳에 오면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 ‘Kim & Hong’의 목표는 열 번의 전시를 무사히 끝낸 뒤 성공한 작가로 남는 것. 이는 시각예술계 후배들에게 ‘예술적인 성취를 얻은 프로젝트 그룹’이라는 전례를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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