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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an 05. 2021

영화 앞에 선 사진에게

누군가는 스틸사진을 마케팅을 위한 ‘바람잡이’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스틸사진은 영화 흥행을 왕왕 가져오기도 한다. 영화 그 자체를 넘어,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스틸사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어제 내린 비>(이장호, 1974) 촬영 스태프와 함께. (사진=은막의 스타, 눈빛)


오늘날의 한국영화가 있기까지


1960년대를 흔히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부른다.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에게 영화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사극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매일 아침 개봉했는데, 60년대 만들어진 영화만 1,300편이 넘는다. 덕분에 영화 시장은 나날이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편협한 영화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국영화를 향해 지지를 보냈다. 60년대 대표적인 영화로는 김기영의 <하녀>가 있다. 하녀로 인해 화목했던 가정이 파국을 맞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텔레비전 보급과 더욱 강력한 유신정권의 통제, 외화 수입 등으로 퇴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롭게 떠오른 장르가 있었으니, 바로 ‘국책영화’다. 이는 독재 정권의 검열 아래 살아남기 위한 영화인들의 방편이었다. 한국 영화에 드리운 먹구름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이때 활발했던 장르는 호스티스 물과 에로영화다. 3S 정책에서 알 수 있듯, 독재 정권은 유독 성적인 요소에 관대했던 까닭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한국영화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서편제>가 전례 없는 흥행(최초 100만 관객)을 거두며,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한국영화는 다양한 기술적·예술적 실험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한국영화는 말 그대로 보는 재미가 있다. 멀티플렉스의 보급으로 영화 시장이 성장했고,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실미도>가 1,000만 관객을 기록했으며, 예술 성향 짙은 영화가 해외 평단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얼마 못 가 세계 금융 위기로 시장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반대급부로 독립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이를 극복한 한국영화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을 연신 쏟아냈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사실 커다란 변곡점이 없어 보인다. 흥행과 실패가 지루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러던 와중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 쾌거다. 한국영화 100년사의 쾌거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틸사진, 영화를 대변하다


한국 영화사는 잘 정리되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틸사진에 대한 연구는 미비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거니와, 상업사진으로 취급됐기에 아카이빙이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빈곤 극복을 위해 필름을 팔아서 사진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필름이 구두약 원료로 사용된 적이 있으니!). 그런데도 대다수 영화인은 스틸 사진이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달라졌다고 말한다. 1980년대 중반 이전의 스틸사진은 지금과 다르다. 사진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순히 기록용이라 보면 된다. 사진가는 영화감독 지시에 따랐다. 이때의 자리 배치를 보면, 영화감독과 촬영감독이 현장 앞쪽에 앉고, 그 뒤로 사진가가 자리 잡았다(역삼각형 구도). 스틸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과 거의 일치했으며, 주로 홍보 자료로 사용됐다. 때로는 극장 벽에 붙여지기도 했다. 또한, 제작비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감독에게 촬영 비용을 한꺼번에 주지 않고 여러 번 걸쳐 주는 것이 관례였기에, 사진을 통해서 ‘일하고 있음’을 증명했던 셈이다. 오래전 신상옥 감독과 일했던 사진가 노기흘은 “스틸컷들은 밤에 현상 인화를 했는데, 밤을 새우더라도 8x10으로 인화해서 다음 날 아침에 감독 책상 위에 펼쳐놓아야만 했다. 신 감독이 아침에 보고 색연필로 트리밍이나 OK 컷들을 표시해 주면, 암실로 돌아가 사진 뽑아내는 작업을 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다. 외딴섬처럼 활동하던 스틸 사진가가 구석을 박차고 나와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정확한 연구 결과는 없으나, 영화 시장 개방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진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인 사진가로 김중만이 있다. 사진가들은 기록을 넘어, 자신만의 개성을 스틸사진에 담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스틸사진의 기반이 이때 마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이전 사진가의 주관적인 감각으로 탄생한 사진이 B컷이었다면(A컷은 당연히 감독의 시선), 중반 이후부터는 온전히 A컷이 됐다.


덩달아 스틸 사진가의 위상도 올라갔다. 포스터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스틸사진을 기반으로 몽타주 작업을 했던 예전과는 달리, 스틸 사진가가 포스터 사진을 연출해서 촬영하게 된 것이다(물론, 강영호, 오형근 같은 영화 포스터 전문 사진가가 존재했던 시절도 있었다). 최근에는 스틸사진이 그대로 포스터에 사용되는 일이 잦다. 예산 절감 측면도 있겠지만, 이는 그만큼 스틸사진이 예술성을 담보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셔터 소리가 줄어드는) 기술이 뒷받침되고, 고조된 배우의 감정과 사진가의 감성이 만난 사진만큼, 영화를 잘 대변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 | 양해남, <은막의 스타>(눈빛)




1960~1970년대 _ 은막의 스타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에게 영화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영화 속 배우들은 특유의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스포트라이트는 감독과 배우가 받지만, 한 편의 영화에는 수많은 스태프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이러한 영화 현장을 기록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스틸맨’이다. 그들은 한국 영화의 명장면과 명배우는 물론, 고통의 시간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태프까지 기록했다.


김승호 <마부>(강대진, 1961). 스틸 양기주

1960년대 대한민국 대표 아버지로 꼽힌다. 그가 325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은 겉으론 투박하지만, 속내 깊은 서민의 아버지, 그러면서 동시에 때로는 꼰대질도 서슴지 않는 인간적인 아버지였다. 1938년 동양극장 ‘청춘좌’에 입단한 김승호는 1946년 <자유만세>(최인규)로 영화계에 데뷔했고, 1955년 <양산도>(김기영)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사에 빛나는 명작들의 주연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돈>(김소동, 1958), <로맨스 그레이>(신상옥, 1963), <마부>(강대진, 1961) 등이 있다. 영화배우 김희라가 그의 아들이다.


구봉서 <부부교대>(김응천, 1972)

구봉서는 해방 전 악극단에서 반주자와 배우로 활동했다. 1956년 <애정파도>(문화성)로 영화계에 데뷔, 많은 작품에서 코믹한 연기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1960년대 후반 크게 히트한 ‘남자’ 시리즈(<남자미용사> 등 6편) 주연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969년 <수학여행>(유현목)에서는 코믹 연기가 아닌, 정극 연기를 완벽히 소화하며 최고 배우임을 인정받았다.


남궁원, 최무룡, 박암, 신영균, 이대엽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남궁원은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린다. 19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으로 영화계에 등장했다. 이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 전속 배우로 소속돼 착실하게 연기 실력을 쌓았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만 머무르지 않고, 연기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 노력파 배우다. 1970년대에는 김기영 감독과 함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했으며, 1980년대에는 이두용 감독의 영화에서 악역 배우로 변신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홍정욱이 그의 아들이다.


남진, 나훈아 <친구>(윤정수, 1972)

가수 남진의 필모그래피는 웬만한 배우 못지않다. 1967년 <그리움은 가슴마다>(장일호)로 데뷔, 무려 6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배역도 대부분 주연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배우 남진의 모습은 멜로영화 주인공이지만, 그는 세 편의 무협·액션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다. 남진 주연 영화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편중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영화 황금시대의 영광 및 쇠퇴와 맞물려 있다. 한국 트로트계에서 가장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 중 한 명인 나훈아 역시 영화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다. 1971년 <풋사랑>(정진우)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남진과는 <기러기 남매>(최인현, 1971)에 함께 등장했다.


박근형 <이중섭>(곽정환, 1974)

박근형은 연극, TV, 영화를 아우르는 걸출한 연기자다. 1959년 연극계에 입문한 그는 1963년 KBS 공채 탤런트에 선정됐고, 1969년 <지하실의 7인>(이성구)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1960년대부터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는 불멸의 스타인 박근형은 현재까지 110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구봉서, 서영춘 <대머리 총각>(심우섭, 1968)

서영춘은 구봉서, 배삼룡, 송해와 더불어 한국 코미디 영화를 이끈 명배우다. 학창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극장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에 들어가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백금녀와 짝을 이루며 쇼 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61년 <인생 갑을병>(박성복)이 그의 첫 영화다.


윤여정 <화녀>(김기영, 1971)

1966년 TBC(동양방송)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다. 당시 개성 넘치는 외모와 발랄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1971년 문제작 <화녀>(김기영)로 영화에 데뷔하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1972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 후 돌연 미국으로 떠났던 윤여정은 1985년 귀국 후 연기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어미>(박철수)에서 열연을 선보이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순재 <지하실의 7일>(이성구, 1969)

대학 시절인 1956년경, 신영균, 이낙훈 등과 연극반 활동에 열중했던 이순재는 1965년 TBC(동양방송) 탤런트가 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6년 정진우 감독의 <초연>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은 후, 1976년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최인현)으로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총 20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추송웅 <병태의 감격시대>(이두용, 1975)

영화배우 추상미의 아버지인 추송웅은 독특한 외모와 발성을 지닌 천생 배우다. 1970년 <돌아가는 삼각지>(박종호)로 데뷔했으며, 1977년 그의 대표작인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와 TV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2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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