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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an 05. 2021

공감의 언어, 사진

김설우

스틸사진을 소개팅에서의 첫인상에 빗대는 김설우는 <남산의 부장들>, <내부자들> 등 굵직한 영화에 참여했다.



영화 스틸사진의 매력은 무엇인가

스틸사진은 ‘소개팅에서의 첫인상’과 같다. 사진에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과연 영화에 관심을 가질까. ‘스틸사진’의 매력은 대중 머릿속에 영화 제목을 각인시키기 위해 멋진 장면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이 스틸사진을 촬영 현장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거면 영상을 캡처하는 편이 낫다. 스틸사진은 영화 내용을 함축해서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단 사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야 전체 영화에 호기심을 갖게 될 테니까.


영화와 결이 다른 사진 콘셉트를 설정하는 것도 스틸사진의 또 다른 묘미다. <유열의 음악앨범>의 경우 스틸사진이 레트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촬영했다. 영화도 복고요, 마케팅도 복고풍인데, 스틸사진까지 레트로 분위기가 나면 자칫 지루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영화의 주된 이야기가 ‘두 연인의 아픔’ 아니던가. 스틸사진이라도 옛날 느낌의 사랑 이야기가 연상되지 않기를 바랐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촬영하는 동안 하이키에 초점을 맞췄다.


희한하게도 <부당거래>, <베를린>,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같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영화에 투입되는 것 같다.

오죽하면 어시스턴트가 “이번엔 몇 명이나 죽어요?”라고 물어볼 정도다. <부당거래>가 큰 역할(?)을 했다. 아무래도 클라이언트는 바로 직전 작업을 눈여겨볼 테니 연쇄작용을 일으킨 듯하다. 사실 어두운 영화를 작업할 때 마음이 편하다.


여전히 온몸으로 기억하는 영화 현장은 무엇인가?

단연 <베를린>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유난히 힘들었다. 스틸 사진가 3~4년 차에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투입되어 부담이 컸다. 일정도 굉장히 빡빡했다. 독일과 라트비아에서 돌아오자마자 인천 매립지에서 가장 격렬한 장면을 촬영했다. 방전된 상태였던지라 무슨 정신으로 셔터를 눌렀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다행히 ‘트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듯한 류승범’ 컷이 반응이 좋았다. 한석규, 하정우, 전지현 등과 작업한 것도 인상 깊었다.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배우들을 컨트롤할 수 없을 것 같아 지레 겁부터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스틸 사진가의 덕목 중 하나가 ‘배우에 공감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그래야 감정선을 잘 표현할 수 있으니까. <베를린> 덕분에 한 단계 성장한 건 분명하다. 이후 큰 규모의 영화에서 나를 불러줬기 때문이다


배우 감정에 빠르게 이입하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

스태프와 신뢰 관계를 쌓는 것. 영화 현장에서 ‘시간은 금’이니까. 간혹 영화 촬영 중간이 아닌, 연출을 통해 스틸사진을 작업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미술팀, 분장팀, 조명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이 최선을 다해줘야 매혹적인 사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재심>을 예로 들면, 보통 포스터 컷은 3~4번 촬영하는데, 이 영화에선 10번 넘게 셔터를 눌렀다. 그만 찍자고 해도, 오히려 정우가 느낌을 살려서 다시 한번 촬영해보자고 하더라.


영화를 좋아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게 스틸사진이다. 몇 달을 매일 같이 똑같은 인물을 만나다 보면, 지겨운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같은 얼굴에서 다른 표정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 사진가의 숙명인데, 영화가 싫다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영화에 맞게 스틸사진의 ‘톤 앤드 매너’도 설정해야 한다. 크랭크인 전 사진집을 많이 보는 편이다. <남산의 부장들> 때는 유진 리차드와 유세프 쿠델카 작업을, <유열의 음악앨범> 때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Sentimental Journey>을 참고했다.


인물을 프레임 안에 꽉 채우는 방식이 눈에 띈다.

클로즈업 사진은 배우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지만, 촬영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틸 사진가는 영화 현장의 메인이 아니다. 카메라가 두 대 있다면, 배우는 영화 쪽으로 가지, 스틸사진 쪽으로는 오지 않는다. 인상적인 클로즈업 컷을 얻기 위해선 사전에 배우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액션에 들어갔는데, 나의 셔터로 인해 배우의 감정선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부당거래> 때 한껏 감정을 잡은 황정민 얼굴을 찍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던 적만 제외하면, 클로즈업 사진을 찍을 땐 배우에게 미리 언질을 준다(에디터 주: 황정민이 기가 막히게 잘 찍은 사진이라고 칭찬해줬을 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최근 작업에서는 <남산의 부장들>에서 권력의 덧없음을 표현한 이병헌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다. 아역 배우를 촬영할 때다. 미리 이야기하더라도 제어가 어렵다. 그래서 <4등> 포스터 컷을 위해서 배가 부를 때 행복감을 느끼는 아이의 심리를 이용했다. 점심 직후 “형이랑 물에 들어가서 놀까?”하고 촬영을 했다. 덕분에 세상 행복한 모습으로 물놀이하는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


배우는 ‘크랭크 업’을 하더라도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스틸 사진가는 어떠한가?

비슷하다. 스틸사진 역시 영화에 맞춰 ‘톤 앤드 매너’를 설정하고 진행하는 작업이니까. 현장에 투입되기 전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 영화를 그 영화처럼 찍게 된다. 촬영이 겹칠 때 신경을 특히 많이 쓰는 편이다.


‘스틸 사진가’, ‘영화인’이라는 수식어를 제외하고, 자신을 영화 현장의 OOO라고 생각하나?

제작팀과 마케팅팀 사이를 오가는 중간다리.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제작팀’과 영화를 잘 팔아야 하는 ‘마케팅팀’이 만날 일은 극히 드물다. 비록 스틸 사진가는 마케팅팀에 속해있지만, 영화 현장에도 가장 오래 남아 있다. 현장 분위기와 스틸사진의 ‘톤 앤드 매너’를 마케팅팀에 잘 전달하는 것 역시 나의 역할 중 하나다. 제작이 끝나면, 전적으로 마케팅 일을 하게 된다. 개봉 전까지 VIP 시사회, 배우 프로필 등을 촬영한다. ‘크랭크인’부터 ‘크랭크 업’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스태프는 스틸사진과 메이킹 필름 파트밖에 없다.


스틸 사진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조언한다면?

스틸사진을 찍고 싶다면, 독립영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스틸사진은 아무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눈에 띄게 찍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좋은 사진을 통해 자신이 노출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한다. 연장선에서, 마케팅팀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2~3주 정도 되는 마케팅 기간에 수십억 원을 쓰는데, 검증 안 된 사진가를 쉽사리 고용할 수 있을까. 불혹인 내가 여전히 막내급이다. 어시스턴트 하면서 사진 스킬을 쌓고, 영화계 안팎으로 얼굴을 각인시키는 게 필요하다. 언젠가는 다른 영화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스틸 사진가는 내 경력에 도움이 되는 멋진 사진이 아닌, ‘영화 흥행에 플러스 요소가 되는 사진’을 찍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 [2020. 07]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2019)

1990년부터 동아일보에 2년 2개월간 연재된 취재기를 기반하여 출판된 원작을 영화화했다. ‘한국 중앙정보부의 부장들과 이들이 주도한 정치 이면사’를 그린 영화는 10.26 사건에 집중한다. 감독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건이지만, 그 인물들이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길래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들렸는지 탐구하고 싶었다.”라고 기획의도를 말한다.


<유열의 음악앨범>(정지우, 2019)

동명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을 시작했을 때 기적같이 두 남녀가 만나게 되는 순간을 그렸다. 영화는 기적처럼 마주치며 시작된 인연이 우연처럼 어긋나면서 애틋하게 사랑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사연을 좇는다.


<진범>(고정욱, 2018)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사람의 상반된 주장과 그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영화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치밀한 구성과 세련된 연출은 관객들로 하여금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한다.


<베테랑>(류승완, 2015)

베테랑 광역수사대와 유아독존 재벌 3세의 대결을 그린 영화. 도심 한복판의 카체이싱, 부산항 추격신 등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리얼한 볼거리와 특별한 재미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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