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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Feb 25. 2021

시간의 흔적, 조각모음

김소라

지난 12월 ‘스페이스55’에서 김소라의 첫 개인전 <사진 동굴>이 열렸다.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을 재구성했다는데, 이는 기억을 소환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재구성하기 위함일까.



김소라의 <사진 동굴> 속 ‘아버지 사진’은 분명 작가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을 테지만, 그 내용을 정확히 알 리 없는 관객에게는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에 가까울 것이다. 학창시절 한 번쯤 가봤을 법한, 수학여행의 메카 경주의 그때 그 풍경을 돌아보게 만드는. 필름을 이용한 다중촬영처럼 보이는 첫인상이나, <사진 동굴>을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디지털 픽셀들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시장 조명 때문인지 작업을 중심으로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렌티큘라처럼 움직이는 느낌도 받는다. 마치 기억의 편린들이 빛(시간)에 따라 요동친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데이터의 중첩, 더 나아가서는 기억의 중첩이다. 전시 공간 역시 흥미롭다. ‘스페이스55’의 독특한 구조가 동굴에 들어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에 ‘음절과 음절 사이의 여백’과 ‘픽셀이 연상되는 각진 박자’가 공존하는 레트로풍 음악까지 들리니, 과거의 경주로 가야 할 것만 같은 모양새다. 디지털로 조합된 것들로 인해 현재의 경주를 떠올리지 못하다니. 플라톤의 동굴이 현세에 재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침대 위에 누워 손끝으로 모든 것을 터치하는 시대, 가상공간을 부유하는 이미지에 큰 신뢰를 보내는 존재가 지금의 우리 모습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멀리서 보면 사진 속 형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픽셀이 드러나 있다.

<사진 동굴>은 ‘모든 것이 데이터로 기록된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기저에 ‘실제 세계는 폐허로 존재하는 미래다. 가상의 미래 인류는 데이터로 기록된 대상을 폐허 위에 구현한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작업의 큰 축을 픽셀로 선택한 이유다. <사진 동굴>을 제작하면서, 이미지&음악 편집 프로그램을 많이 다뤘다. 이미지를 사고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을 닮아가더라. 화면 안 대상을 자세히 보기 위해 화면을 확대하면, 원래 이미지는 사라지고 픽셀만이 남게 되지 않나. 이 과정에서 물성이 다가오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사진 동굴>의 핵심은 여러 개의 레이어를 겹치는 것이다. 각각의 이미지에 다양한 크기의 픽셀들을 교차하여 이미지를 중첩했다. 이를 통해 고정된 대상이 아닌, 시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렌티큘라처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흥미로웠다. 전시 설치 때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기획단계부터 ‘스페이스55’를 전시 공간으로 염두에 뒀다. 배경이 되는, 폐허가 된 세계에 과거 이미지가 구현된 느낌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싶어, 공간에 존재하는 창문과 기둥 벽면 특징들에 대해 고민했다. 특히, 창문에 설치된 이미지들은 자연광을 받았는데, 해가 지면 낮과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됐다. 달라지는 빛을 통해 시간을 느낄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1979년 촬영된 아버지의 경주 여행 사진들과 이를 단서로 경주에 가서 촬영한 2020년의 사진을 중복, 보는 이가 여러 시간이 중첩된 경주를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굴 안에 투영된 경주 이미지들을 통해 실제 경주와 그곳을 여행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려고 경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탑과 불상 등의 이미지를 넣었다.



프린트 방식도 흥미로웠다.

<사진 동굴>은 레이어에 주목한 작업이다. 처음에는 OHP 필름 위에 이미지를 출력, 간격을 넓혀보며 프로그램상 이미지들을 어떻게 설치할지 고민했다. 가장 많이 고려했던 건 스케일이다. 투명 필름지를 이용한 작업은 크기가 커져서 전시 땐 아크릴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표면에서 빛 반사가 강하게 일어나 중첩된 이미지를 경험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시폰 원단과 투명 용지만 사용했다. 또한, 물성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보편적인 홍보물 출력 방식(배너, 캔버스 인쇄, 현수막 등)을 적극 활용했다.


작업에 영향을 준 사진과 텍스트가 궁금하다.

2019년,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읽었다. 일종의 애완동물을 키우기 위해 가상세계의 디지털 생명체를 제작하고, 디지털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그 생명체가 겪는 일들과 이에 반응하는 인간의 감정을 묘사한 책이다. 허구의 이야기지만 충분히 현실적이었던 까닭에, 어렴풋한 미래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 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책으로 제작된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의 <환송대>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사진 이미지가 가진 시간의 이중성(과거를 지시하지만, 아득한 미래처럼 느껴지는)을 통해 과거로부터 추출된 미래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크리스티앙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의 설치작업과 다이안 메이어(Diane Meyer)의 자수도 살펴보았다.




<사진 동굴>은 과거 기억을 소환(추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까? 아니면, 기억의 재조합(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까?

기록된 과거의 데이터를 추적한 작업이지만, 이는 원래의 것을 그대로 소환해내기보다는, 재조합을 통해 대상을 쫓으려는 행위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물들을 통해 보는 이가 그 대상을 잠시나마 마주할 수 있으면 했다.


‘사진 동굴’과 ‘데이터’, ‘미래’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사진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작업 배경으로 설정했던 모든 것이 데이터화 된 미래 세계의 모습이 ‘사진 동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로 향하는 과도기에 많은 것들이 데이터화 되어가고 있는 지금, 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매일 보며 미래를 추측하고 상상한다. 우리가 나아갈 미래는 데이터로 둘러싸인 ‘사진 동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영상이나 SNS를 통한 간접 경험에 더 익숙하다. 폐허가 된 세계에 기록된 대상을 구현하려는 미래 인류는 데이터로 뒤덮인 세계에서 물성적 경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1. 02]




김소라 모든 것이 데이터로 기록된 미래 세계를 작업 배경으로 설정,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시각, 청각 매체를 결합한 작업을 하며, 매체를 활용해 경험과 기억 같은 추상적 상태를 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 중이다. 인스타그램(@print_print_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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