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 열풍’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던 초기의 예언은 그 효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옛것을 열렬히 원하는 시대의 분위기는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궁금하다. 단순히 인간이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좋은 것만 기억하는 것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므두셀라 증후군 때문일까.
이렇게 즐기면 기분이 조크든요
<사랑의 재개발>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싹 다 갈아엎어달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나비 하나 날지 않던 나의 가슴도 재개발해달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공감이 되질 않는다. 쿨병에 걸린 사람에겐 찌질하게 보이겠지만, 지나간 사랑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마음속 자그마한 방에 숨겨두는 것이 보통의 연애가 아니던가. 김정민도 <애인>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네가 있던 그 자리엔 누구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발칙하게도’ 유산슬은 그대 맘을 심으면 뭐든 피어나 팥도 나고 콩도 나니, 자신을 얼른 ‘뉴페(새로운 사람)’와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고 한다. 마음속 구조물을 해체하고, 인테리어를 바꿔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환승 출사표’가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에겐 영 탐탁지가 않다.
유산슬의 의지와는 달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은 ‘재개발’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아파트 열풍은 제외). 과거의 힘이 오늘과 미래보다 세 보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복고 열풍의 물꼬를 튼 ‘응답하라 시리즈’, 자연주의적 삶과 힐링을 우선 가치로 내세웠던 ‘삼시세끼’와 ‘효리네 민박’, X세대 문화를 귀환시킨 ‘무한도전 토토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LP 레코드판과 필름 카메라 수요층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길거리에선 오버사이즈 재킷, 통이 넓은 슬랙스, 빈티지 체크 패턴, 코듀로이 등의 패션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한,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온라인 탑골 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예전 문화가 ‘끌어올림’ 당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주로 연예인이지만) 자연스럽게 옛날 사람의 발자취를 지르밟게 됐다. 일시적 유행일 것이라던 복고 열풍 초기의 분석과는 정반대의 행보다.
한마디로 ‘레트로와 뉴트로가 뒤섞인 요지경 세상’이다. 얼핏 똑같아 보이지만, 레트로(Retro)는 ‘과거의 것을 다시 꺼내 향수를 즐기는 것’을, 뉴트로(New+Retro)는 ‘같은 과거의 것이지만, 이를 즐기는 계층에겐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 즐기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단어 사용이 달라지는 셈이다. 굳이 나누자면 레트로는 30대 이후 세대를, 뉴트로는 10~20대를 대변한다만, 어찌 됐든 둘 사이엔 옛것을 즐긴다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날로그의 반격>의 저자 데이비드 색스는 “디지털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제 좀 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한다. 아날로그 경험은 디지털 경험이 주지 못하는 실제 세계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라고 말한다. 규격화, 획일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적 사고에서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과거의 것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닌, 사람이 먼저인 감성을 우선시하겠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오늘이 각박하고 내일이 불투명하니, 누군가에게는 좋았고 누군가에게는 좋아 보이는 과거를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봄’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과거 회귀 성향을 ‘레트로토피아(Retro+Utopia)’로 설명한다. 복고의 ‘레트로’와 지상낙원의 ‘유토피아’가 합쳐진 이 말은 향수를 통해 현재라는 절망의 구렁텅이를 벗어나 행복감을 느낀다는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가 과거지향으로 역행하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과거의 이상향으로 이끄는 원천은 무엇일까.
세대를 뛰어넘은 라떼는 말이야
“처음서부터 넌 좀 특이했어. 눈빛으로 대화하는 너의 얘기,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어. 너를 보는 순간 판타지, 느낄 수가 있는 엑스터시.” - 양준일 <Fantasy> -
12월의 기적이 봄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지난 12월 6일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사라진 가수를 소환하는 예능프로그램 <슈가맨>이 방송된 이후, 대중가요를 둘러싸고 조크(joke)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한가운데 ‘90년대 가수’ 양준일이 있다. 그의 등장으로 30년 전 오늘을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사이엔 공감대가 형성됐다. 과거와 현재라는 타임라인 속 사람들이 양준일의 음악을 즐기게 된 것이다. 90년대 주류에는 속하지 못했던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요즘과 견주어도 전혀 괴리감이 없다는 게 그를 좋아하는 팬들의 목소리다. 이와 관련, 작사가 김이나는 “시대를 타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은 것밖엔 없었다.”라는 말을 했고, 대중문화평론가 하재근은 “과거 한국 사회가 편협해서 이처럼 재능 있는 이를 밀어냈다는 생각에 대중들이 지금이라도 띄워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양준일만이 잊힌 음악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는 선봉장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EBS의 <싱어즈-시대와 함께 울고 웃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로그램은 국민의 시름과 애환을 달래주고, 때로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 70~80년대 가수들을 기록하고자 기획됐다.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오로지 인터뷰와 노래만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까닭에 옛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엄마, 아빠의 젊었을 적 감성에 공감할 수 있는 건 덤이다. 이외에도 영화 <알라딘>과 <보헤미안 랩소디>는 관객들이 추억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는 ‘싱어롱 상영’의 반응이 뜨거웠고, god와 H.O.T, 젝스키스, 핑클 등은 긴 공백기가 무색할 정도로 강력한 음원 파워를 과시했다.
흘러간 가요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유튜브에서 시작됐다. 90년대 당시 10~20대였던 사람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경험한 ‘디지로그’ 세대다. 아날로그 콘텐츠와 디지털 기술을 잇는 데 거리낌이 없다. 다시 말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영상을 모바일 환경에 맞게 짧은 호흡으로 편집하는 일이 익숙하다. 이를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고 즐길 수 있다. 반면, 10~20대에게 추억의 가요는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덕분에 온 가족이 노래를 감상하며 허물없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세대 간 단절을 해소하는 데 제격이다. 특히, 어른들은 눈치 보지 않고 ‘라떼는 말이야’를 부르짖을 수 있다. 세기말 감성이 짙게 밴 음악의 긍정적 효과다.
전설이 된 희귀 아이템
복고 열풍을 설명하는 데 게임을 빼면 섭섭하다. 학교 앞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고 하던 게임을 이제는 집에서 즐길 수 있다.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세이부 컵 축구>, <철권> 등이 담긴 게임기와 컴퓨터 프로그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게임은 스마트폰으로도 즐길 수 있다. 이들의 부활은 옛날 게임 고수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는 콘텐츠까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동영상은 높은 조회 수만큼이나 게임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90년대 청소년들의 성적 하락 주범인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도 소환됐다. <스타크래프트>는 <스타크래프트 2>가 출시되었음에도, 우리나라 e-스포츠의 붐을 일으킨 클래식 버전에 대한 충성심이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모바일로 돌아온 <리니지2M>은 하루 매출이 40억~50억 원으로 추정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게임계 복고 열풍은 물질적·심리적 보상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추억의 게임을 즐기던 이들이 경제력을 갖춘 결과다. 더는 100원, 200원에 연연하지 않게 되니, 마음 놓고 ‘현질’을 할 수 있어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제작사가 이들 눈높이에 맞춘 게임을 선보이는 건 당연지사다.
식도락 문화 역시 주목해야 한다. 사카이 노부유키 음식 심리학 교수에 의하면, ‘맛있음’은 미각, 후각 등의 감각과 기억을 뇌에서 종합하여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보이는 맛’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때 그 시절 먹거리를 그리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마트와 편의점이다. ‘두꺼비’로 상징되는 과거 소주병 모양을 되살려 출시한 ‘진로이즈백’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며, ‘랄라베어’와 촌스러운 글씨체를 재해석한 ‘OB라거’는 애초 한정 판매할 계획이었으나, 반응이 좋아 판매 경로를 점차 확장하고 있다. ‘아재 입맛 판독기’가 ‘힙함의 대명사’가 되는 일도 있다. 복고 식도락의 메카는 단연 을지로와 종로다. 노가리와 생맥주를 파는 노포는 초심자 코스다. 쿰쿰한 감잣국과 노른자 띄운 쌍화차, 푸아그라처럼 부드러운 돼지 간 정도는 먹어줘야 이곳에서 방귀 좀 뀐다고 할 수 있다. 힙한 음식은 매출로 직결됐다. 얼마 전 상가정보연구소는 복고 열풍이 불면서 11월 기준 돈의동 고기 골목의 월평균 추정 매출이 종로구 고깃집 월평균 매출보다 585만 원 높다고 발표한 바 있다.
손으로 만지는 추억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진이 사라지고 있다.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사진의 양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손으로 만지거나 흔들 수 있는 게 없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 <아날로그의 반격> 중
아날로그 사진이 큰 인기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사진을 쉽게 찍고 마음대로 지울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과거를 추억하는 사진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결과물을 마주하기까지 느끼게 되는 설렘의 감정도 한몫했다. 사진이 사라지는 시기,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사진을 되살리고 싶은 열망이 피어났다. 사진의 물질성, 기다림의 미학 등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던 필름이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고, 일회용 필름 카메라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도 우후죽순 재등장했다. 중고시장은 ‘득템’을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뜨겁다. 미놀타, 콘탁스 같은 아날로그 콤팩트 카메라를 손에 넣기 위해선 ‘광클’이 일상화돼야 한다. 반작용도 있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어느 순간 필름 가격이 다시 한번 뛰더니, 인기 있는 카메라는 부르는 게 값이 됐다. 취미가 아닌,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전업 사진가에게는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이 35mm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행위에만 관심을 두는 건은 아니다. 아날로그 사진을 촬영해 주는 사진관들이 의외로(!) 성업 중이다. 등대사진관의 ‘틴타입 초상사진'은 물론, 물나무사진관의 ‘자화상 프로젝트’, 오르페우의 오래된 대형 카메라를 이용한 초상사진 같은 독특한 아날로그 사진을 경험하려면, 예약 전쟁은 필수다. 지방에도 근대흑백사진관 그리다(부산), 석주사진관(대구) 등 고전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사진을 촬영해 주는 곳들이 있다. 더불어 ‘포토매틱’에서는 중형 카메라로 셀프 사진과 현상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서울칼라’에서는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하는 현상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동행하는 카메라도 있다. 오로지 ‘사진’만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라이카 M10은 필름 카메라처럼 조작을 단순화했고, 동영상 기능을 탑재하지 않았다. 또한, 후지필름 X시리즈와 올림푸스 PEN-F 시리즈는 아날로그 디자인과 하이엔드 기술의 집약돼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향수라는 방어기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본 발터 벤야민은 다음의 글을 남겼다. ‘천사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열려 있다.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천사는 잔해 위에 잔해를 쌓고, 그것을 그의 발밑에 던져 놓는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무르길 원하고, 죽은 자들을 깨워서 조각난 것을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폭풍은 낙원으로부터 불어와서 그의 날개를 장악한다. 그것은 너무 강렬해서 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 이 폭풍은 천사의 등이 향한 미래를 향해 그를 불가항력적으로 밀어낸다.’ 그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아홉 번째 테제다. 미래로 가야 하지만, 과거에 발목이 잡혀 갈팡질팡하는 천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벤야민의 아홉 번째 테제는 과거와 미래의 관계, 즉 역사를 논할 때 자주 사용되는 글이다. 조크 같은 일이 벌어져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의 무게 축이 급격히 기울어져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기는 하나,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복고 열풍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향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소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불안 마케팅의 하나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아날로그 콘텐츠를 통해 불안한 심리를 달래 보라는 세력에 종속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응당 이익은 주체 세력의 몫이다. 몇 년 전 인문학 열풍이 불었을 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철학자만이 두둑한 인세를 챙겼던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벤야민으로 다시 돌아와, 스베틀라나 보임은 향수를 ‘삶과 역사적 격변의 리듬이 가속화된 시대의 방어기제’로 본다. 시궁창인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향수라는 뜻이다. 대중문화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과 영국의 브렉시트를 보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를 버리고, 의도적으로 과거에 발목 잡힌 형국이다.
우리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세대 갈등과 진영 논리를 언급할 것도 없다. 대중문화만 보더라도 왜 갑자기 이슈가 됐는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추억이 마음에 위안을 주지만, 과거가 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례로, 대중음악 최전성기라던 90년대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기억 속 이미지가 보정(왜곡) 된 건 아닌지 경계해봐야 한다. 기억은 늘 강자의 편에서 조작되기 마련이다. 라떼를 말하지 말라면서, 내가 허전할 땐 라떼를 소환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는 선별된 과거가 현실의 희망을 흐릿하게 만드는 꼴이다. 과거에만 목을 맨 허무주의는 파시즘의 동력이 될 뿐이다. 비록 대중문화가 사회의 일부분이지만, 불편함의 정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즐길 건 즐기되, 심취하는 건 주의해야 할 것이다.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를 경계하며, 대안으로 대화를 제시한다. 다소 막연한 결론이나, 단절된 개인과 사회, 너와 나를 다시 연결하고, 텅 빈 마음을 채우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 서로 불편하더라도 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려고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유산슬의 발칙한 재개발 방식도 썩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지금이다. [202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