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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Jun 27. 2021

달콤한 외도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화·예술인의 외도를 통해 ‘도전의 재미’를 맛보는 시간.


가수 ‘필독’의 개인전 

외도라 쓰고 도전이라 읽는다


‘외도’하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인가. 아마 백이면 백 ‘외도=불륜’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외도(外道)’를 검색해보니 세 개의 뜻이 나온다. 하나는 상상하는 ‘그 의미’인 ‘불륜’이요, 다른 하나는 ‘바르지 아니한 길이나 노릇’, 나머지 하나는 ‘본업을 떠나 다른 일에 손을 댐’이다. 당연히 문화·예술에서 ‘외도’를 논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 역시 ‘그 의미’다. 세속적인 것과 (불륜 남녀가 주장하는) 정신적·예술적 교감 사이의 끈적끈적한 긴장만큼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많은 것을 상쇄시킨다.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들의 사랑(?)은 일견 ‘봉건시대’를 보는 것 같다. 정략결혼을 한 뒤 시간이 흘러 만난 다른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느끼는 것이 그때의 전형적인 레퍼토리 아니던가. 요즘 시대에 결혼을 빙자한 계약이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이들의 만남은 향수를 통해 현재라는 절망의 구렁텅이를 벗어나 행복감을 느끼는 레트로토피아처럼 보인다. 비록, 이러한 농익은 레트로토피아적 사랑의 말로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만.


외도가 가진 ‘나머지 하나의 뜻-본업을 떠나 다른 일에 손을 댐’을 거론하기까지 빌드업이 길었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이 독특한 사랑을 해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터. 하지만 그 대상이 늘 ‘남과 여’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분야의 작업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매체에 도전하고, 또 사랑에 빠진 예도 많았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 중이기도 하다. 마치 개그맨 유재석과 트로트 가수 유산슬의 관계처럼 말이다. 외도라 쓰고 도전이라 읽을 수 있는 예술가들은 누가 있을까. 문화·예술과 사랑에 빠져 다른 길에 도전했던 사람들.


가수 ‘나얼’이 디렉팅 한 브라운아이드소울  앨범 커버

역사 속 팔방미인


교과서에서 보았던 예술가들에게 ‘도전’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다소 애매하다. 실제로 그들 삶을 본 적도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어보면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피카소만 봐도 천재성은 어렸을 때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보고 붓을 꺾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피카소는 이미 10대 때 자신보다 먼저 활동한 화가들 기교에 통달했고, 큐비즘을 발전시킨 것도 모자라,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그림까지 그렸다. 우리에게 유명한 건 피카소의 회화지만, 그는 도예, 조각, 판화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발레 공연 무대와 의상도 디자인했고, 시와 희곡까지 집필했다고 한다. 영국 신고전주의의 마지막 화가로 불리는 존 윌리엄 고드워드의 “피카소와 내가 함께 살기에는 이 세상이 크지 않다.”라는 말이 깊게 와닿는 대목이다.


피카소 이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 그는 건축, 육상, 음악, 조각, 철학, 회화 등에 능통했다. 심지어 현대 기술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기계도 디자인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끈기가 부족했다는 것. 여러 분야에 정신을 빼앗겨 끝까지 마무리한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완성한 그림 수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재능에 근면·성실이 더해진 인물도 있다. 바로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 윌리엄 모리스다. 디자인 외에도 건축, 그림, 사회 운동, 시, 예술평론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술의 창조와 그것에 따르는 일의 즐거움은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작품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의 일부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졌던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과 노동이 하나 되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꿨다.


래퍼 ‘더 콰이엇’의 사진집  중

운명과 도전 사이에서


‘팔방미인 예술가’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건 서양인이다. 서양사 중심으로 예술을 공부한 것도 이유지만, 동양적인 정서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각적·청각적 강렬함을 주는 건 서양 예술이기 때문이다. 명성은 뒤처질지 모르나, 인구 대비 팔방미인 숫자로 비교하면 동아시아가 서양보다 앞설 것이다. 흔히 문인문명(文人文明)이라 하지 않던가. 조선 시대와 송나라 이후 중국은 문인이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문인은 육체보다 정신적인 부분을 중요시했고, 시·서화, 종교 같은 문화적 가치를 추구했다. ‘사람과 글씨와 그림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를 의미하는 중국 예술론 속 구절 ‘기인기서 기인기화(其人基書 其人基畵)’와 여가에 자신들의 마음을 시서화(詩書畵)에 표현한 사대부 계층이 대표적인 예다.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라는 평을 받은 <적벽부>의 소동파는 문장뿐만 아니라 수묵화에 능했고, 조선 후기 최대 학자이자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국보 180호’에 지정되어 있다. 신분은 다르지만, 기녀 황진이도 손꼽히는 재주꾼이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시서화를 즐겼으며, 가무도 출중했다. 그야말로 조선 시대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사실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던 선인들을 ‘도전’과 연관 짓기엔 무리가 있다. 대부분이 지배계급이었기에 자연스레 여러 문화·예술을 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특혜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 분야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가 다른 분야에 도전했던 예술가로는 누가 있을까.


근래 인상적이었던 건 음악인들의 행보다. 먼저, 장한나는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했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지휘자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을 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 첼로 레퍼토리에 한계를 느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서다. 어렸을 때부터 첼로 신동 소리를 들었기에 그의 새로운 음악 여정이 예전 문인의 삶처럼 보이지만, 장한나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함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이라고. <놀면 뭐하니>에서 ‘터키행진곡’을 연주해 화제가 된 손열음도 있다. ‘차이코프스키콩쿠르’에서 상을 휩쓴 피아니스트지만, ‘평창 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고, 본인 이니셜을 딴 기획사도 설립했다. 또한,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집필한 글을 모아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김가온, 박규희, 양성원은 사진 찍는 음악가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가온은 사진을 찍어 아내인 강성연과 함께 태교 책을 냈고, 첼리스트 양성원은 풍경 사진을 멋들어지게 찍는다.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롤라이 플렉스’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 앞에 공개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다.


라이카 카메라의 전시 <오! 라이카>에 참여한 가수 ‘오혁’


다른 곳에서 발현된 넘치는 끼


구체적인 성과를 볼 수 있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대중문화 분야다. <무한도전>, <놀면 뭐하니> 같은 예능 프로그램만 봐도 클래식 예술과 거리가 먼 연예인들이 그림과 악기 연주에 도전하지 않던가. 시청률을 위한 프로젝트성 도전이었으나, 클래식 예술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준 부분은 긍정적이다. 한때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책방을 여는 것도 유행이었다. 노홍철, 박정민, 오상진-김소영 부부 등은 독립서점을 열어 본인만의 북 큐레이션을 선보인 바 있다. 결이 다르지만, 스포츠 스타의 연예계 진출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장훈, 안정환, 허재는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으며, 김병현은 예능인과 더불어 햄버거집 사장으로 맹활약 중이다. 얼마 전에는 그의 별명인 ‘법규’를 상호로 법인 사업자까지 냈다.


잠시 이탈했던 문화·예술 궤도를 제자리로 돌려보자. 종종 스포츠 스타가 시각예술에서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삼성라이온즈 투수 백정현은 ‘백작가’라 불릴 정도로 사진을 감성적으로 잘 찍는다.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은 야구팬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현역 선수라 아직은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지만, 은퇴 후 랜디 존슨처럼 사진가로 전업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편, 사격선수였던 김현우는 사격복을 디자인해 관심을 끌었고, 빙상 국가대표였던 박승희 역시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공부 중이다. 흥미롭게도 축구인 신문선은 체육인 최초로 미술관장이 됐다. 청년 작가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그의 목표다.


삼성라이온즈 ‘백정현’의 사진. 인스타그램(@ baek_junghyun)
우울증 치료를 위해 시작한 그림이 작품성을 인정받은 솔비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연예인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넘치는 끼가 본업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발현되는 모양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그림은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자유로운 측면이 많아 연예계 생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연예인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줘야 했던 입장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로 전환돼 심리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을 터. 매체만 다를 뿐, 감정을 표출하는 건 일맥상통하다. 구혜선, 나얼, 하정우 등은 너무나 잘 알려진 ‘연예인 화가’로 꼽힌다.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 건 솔비다. 우울증 치료를 위해 시작한 그림이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라이카 카메라의 전시 <오! 라이카>에 참여한 가수 ‘송민호’


아이돌 스타인 송민호와 필독도 있다. 송민호는 성남아트센터 <SEEA 2019>에서 작가로 데뷔했고, 필독은 레이블 갤러리에서 ‘긍정’을 주제로 키치적인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회화에 비해 사진은 더 대중적이다. SNS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아이돌 사진가의 작업을 쉬이 볼 수 있다. 갓세븐 진영, B1A4 공찬, BTS 뷔, 비투비 프니엘, 인피니트 엘 등이 찍은 사진은 취미 차원을 넘어선 수준이다. ‘라이카 카메라’의 사진전 <오! 라이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동안 더 콰이엇, 박찬욱, 오혁 등 엔터테이너들이 참여해 자신들의 영감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셀럽의 도전은 아름다우나, 그들의 미술계 진출은 항상 논란거리다. ‘차별’이냐 ‘인식의 전환’이냐. 전업 작가와 연예인 사이의 괴리감은 상당하다. 진입 장벽 자체가 다른 탓이다. 전시 기회, 작품 가격 모두 연예인에게 유리하다. 미술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신진작가 사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호의적인 반응도 있다. 연예인을 통해 미술 저변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그런데 연예인이 참여한 전시에 가보면, 그의 작업 앞에서 인증 사진만 찍고 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솔직히 정답을 모르겠다. 도전이라는 이름을 빌려, 부수적인 것까지 독식하는 느낌이랄까. 미디어에 나와 자신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다고 말하는 것이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도전은 도전이고, 도생은 별개의 문제일까. 지금으로서는 ‘누구나’가 ‘아무나’로 전환된, 문화·예술과의 잘못된 만남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2020. 04]


배우 구혜선의 사진 에세이 <나는 너의 반려동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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