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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Oct 31. 2021

뭉우리돌을 찾아서

김동우 

중국 대련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순국지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단지동맹비

이내 사라질 것만 같은 흐릿한 인물의 모습이 애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만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공간과 인물을 기록한 김동우의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우리 기억 속에서 점점 잊히고 있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긴 작업이다. 일제 순사로부터 “지주가 전답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상례”라며 고문과 함께 자백을 강요받았던 김구는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뭉우리돌 정신이 깃든 터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왜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앞장서하고 있냐고.


멕시코 살리나크루즈 해변,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상선 한 척이 출항한다. 1,033명의 사람들이 좁은 선실을 가득 채웠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묵서가<墨西哥>라 불리는 멕시코 땅이었다. 조상들은 40여 일 간의 항해 끝에 멕시코 살리나크루즈 해변에 도착한다. 파라다이스가 펼쳐질 거란 헛된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멕시코 멕시코시티,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후손 다빗 킴
김익주는 1905년 32세 나이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 이민 배에 오른다. 4년간의 계약 노동 기간이 끝나자 탐피코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큰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공한 한인이 된다.
당시 그가 지은 한국식 정자 모양 2층 식당은 당시 탐피코에서 제일 유명한 건물이었다. 김익주는 이렇게 모은 재산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보탠다. 



일본 가나자와, 윤봉길 순국지
윤봉길은 의거 뒤 6개월간 상해에서 고초를 겪는다. 일제는 윤봉길을 비밀리에 일본 오사카로 압송한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가나자와로 보낸다.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은 가나자와 성터 위수구금소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다음날 오전 7시 27분, 25살 청년 윤봉길은 미간에 총탄을 맞고 순국한다. 사진은 윤봉길이 마지막 밤을 보낸 가나자와 성터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암매장된 계단 가 모습이다.
“작가 선생, 어디서 사진을 찍고 싶으세요?” 
2대째 윤봉길 의사 암장지를 관리하는 박현택 선생님이 물었다.
“음… 동해가 보이는 가나자와 해변은 어떨까요. ” “30분만 가면 되니 그럽시다.”
해변에 도착해 차 트렁크를 열어 보니 사진 액자가 하나 나왔다.
“선생님! 이거 윤봉길 의사 사진이잖아요!” “항상 가지고 다니지요.”
액자를 고이 받쳐 들고 해변을 걷는 노신사의 뒷모습이 마치 그 누구의 영결식 한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쿠바 마탄사스,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후손 마르따 임
임천택은 1903년 출생으로 3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행 배에 오른다. 그는 18세 때 쿠바 마탄사스로 이주해 애니깽 농장 노동자로 일한다.
임천택은 한글학교를 세우는 한편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며 쿠바의 대표 독립운동가로 성장한다. 그는 쿠바의 유일한 한인 이민 역사서였던 <큐바한인이민력사> 의 저자이기도 하다.



쿠바 까르데나스,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후손 레오노르 이
이윤상은 1910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임시정부 등에 독립자금을 지원한 인물이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마탄사스·까르데나스·마나티 등에서 지지대회를 열고 특별후원금 등을 보낸다.
얼마 전까지 이윤상은 기록에만 존재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 지난 2018년 레오노르가 그의 후손이란 게 확인된다. 그전까지 레오노르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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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멕시코에 있던 한인 300여 명이 첫발을 내디딘 쿠바 마나티 항구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신문방송학과 재학 중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졸업 후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자연스레 사진과 멀어졌다. 퇴직 후 책을 내고, 여행을 다니는 동안 사진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이때부터 사진에 진지하게 접근했다. 한동안 기자로 일해서 그런지 공부하는 동안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형식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오롯이 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다시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엔 주제를 잡기 어려웠다. 마음이 동하는 소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2017년 7월,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우연히 인도 ‘레드 포트(Red Fort, 무굴 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건설한 왕궁)’에 도착했다. 이곳이 나의 삶의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레드 포트’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1943년 아홉 명의 광복군이 이곳에 파견돼 영국군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광복군 이름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임시정부에 요청한 암호해독과 통신감청 등이 가능한 병력이었다. 실제 이들은 일본군에 대항해 성과를 거둔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임시정부는 ‘연합군 참전국 지위가 있어야 독립을 요구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 이들을 ‘레드 포트’에 파견했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역사인 셈이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인도하면 석가모니, 카레만 떠올랐는데, 독립운동이라니. 제도권 교육을 받았음에도 역사에 무지하다는 점이 마음을 울렸다.


궁극적으로 작업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것. 처음엔 사적지만 기록하려 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다큐멘터리에 사람 이야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찍은 인물은 멕시코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손자 다빗 킴이었다. 1905년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간 노동자들이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귀국할 나라가 사라지자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김익주다. 다빗 킴 집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그의 딸 얼굴에서 한국인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독립운동가들 기억이 이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되새김질하려면 이러한 모습을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공간과 사람을 외롭게 두면 안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역사를 되새김질하기엔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다.

가장 한계를 느낀 건 윤봉길 의사가 돌아가신 ‘가나자와 성터 위수구금소’에서 촬영했을 때다. 성공한 역사뿐만 아니라, 슬픈 역사도 알아야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면서 진행한 작업이다. 윤봉길 의사가 세상을 떠난 그날, 그 시간,그 장소에서 셔터를 눌렀다. 그가 갇혀 있었던 그곳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어서다. 당시 텍스트 없이 한 컷의 사진만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이란 매체가 역사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결론은 우직하게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 예술성을 돋보이기 위한 작업이 아니므로, 텍스트를 적절히 곁들이는 게 효율적이란 판단을 했다. 최근에는 영상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전시 때 부수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최재형 순국지 (추정)


클래식한 관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라는 신화를 신봉하는 장르다. 그러나 <뭉우리돌을 찾아서>에는 예전 ‘충실한 기록성’을 자랑하는 사진에선 볼 수 없었던 사진적 기법이 보인다.

‘기록’ 의미가 강한 작업이다. 합성이 아닌, 한 컷으로 찍어낸 결과물이다. 다빗 킴을 만나러 갈 때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할지 고민했다. 인터뷰 형식으로 찍는 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문득, 멕시코에선 독립운동가 김익주가 유명하겠지만, 한국 사람에게는 생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들의 기록과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점점 희미해지는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장노출 기법을 선택했다. 카메라 앞에 인물이 앉아있다가 중간쯤 일어나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장소성이 가진 분위기와 의미를 부각하려 했던 윤봉길 의사 작업도 연장선에 있다. 겨울에 벌어진 일을 여름에 촬영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이미지들이 새로운 현실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록에 충실한 작가 작업이 이런 흐름에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지표성. 다시 말해, 사진이 좋고 나쁨을 떠나, 내가 그 현장을 밟았다는 것.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건 한 장의 사진이 증명한다. 이렇게 역사를 찾아다닌 사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사진 한 장으로 우리 역사를 보여주는 게 우선시돼야 한다. 여기에 충실히 하려면, 작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인도 델리 ‘레드 포트’,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


어쩌면 국가적 사명을 작가 혼자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뿌듯했던 일, 좌절했던 일이 궁금하다.

열심히 자료를 읽었다고 믿었는데, 현장이 자료와 맞지 않아 당황한 일이 부지기수다. 연로하신 독립운동가 후손분들께 촬영하자는 말을 건네는 것도 송구스럽다.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셔터를 몇 번 눌러야 하는데, 여러 번 앉았다 일어나는 행동이 그분들에게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 나와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때 내가 찍은 사진이 자료로 사용됐다. 한인 비행사 양성소였던 미국 ‘윌로스 비행장’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돼 현재 정부에서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무언가를 바꾸는 데 사진 한 장이 사용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사회에 일조한 것 같아 뿌듯했다.


현실적인 질문. 전시/출판으로 작업을 공개했을 때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작업 이야기를 했을 때 반응을 비교한다면.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 자체를 몰랐다. 섭외 전화를 받았을 때 미국 가수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엄청나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방송 전에는 사진가 중에서도 소수만 내 작업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송 후 여기저기서 응원 메시지를 받았고, 몰랐던 역사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동우라는 이름보다는, 작업을 먼저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과의 접점을 찾는 것도 작가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2021. 06]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와 독립운동가 후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올봄 ‘라이카 스토어 청담’에서 개인전 <Land of Glory_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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