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계속 가다

"가 보면 뭐가 있는지 알게 되겠지.”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11. 계속 가다


학원 사무실로부터 호출이 왔다.

“처음 8주로 계약하셨잖아요. 이번 주 중에 연장할 건지 아닌지 결정해 주세요.

만약에 연장할 거면 입금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4주씩 연장은 안 됩니다.

대기 학생이 많아서 최소 8주 이상으로 연장하셔야 합니다.”

결국 돈을 더 내라는 말이다.


좁아터진 방에 돌아와서 창밖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통장 잔고는 아직 남았지만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다.

내 능력으로는 두 달 정도 학원생활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여기 와서야 알았다.

처음 계획은 두 달 후 한 달씩 연장하는 것이었다. 한 달 연장 불가라는 학원 규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 세상은 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알렉스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알렉스는 3개월치를

한국에서 내고 왔는데 학원 수업이 끝나면 연장하지 않고 방을 구해서 밖에서

한두 달 살아 볼 생각이라고 했다. 사실은 지금도 학원 수업이 지루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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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학원 외부에서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학원은 통제가 심해서 맘대로 현지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또 사귀기도 어렵다.

학원에서 2~3개월쯤 지나면 현지 생활에 익숙해지는데 그때쯤이면 많은 학생들이

바깥 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한 달 치 학원비와 용돈 정도면 밖에서는 두 달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학원 밖으로 독립하고 싶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3개월 정도가 지나면 학원 공부에 식상하게 되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니 지루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

또한 가끔 밖에서 현지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학원에서 배운 영어가 잘

안 먹힐 때가 있다.


학원에서는 정제된 미국 영어를 중심으로 회화를 가르친다. 선생들도 항상 제대로 된

영어 표현만 쓰려고 한다. 그런데 일반 필리핀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슬랭도 쓰고

‘필리핀 영어’를 쓰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학원에서 배운 영어가 실전에서

안 먹힌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이다.


선생들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도 통하니까 내가 영어 좀 하는구나 싶지만 막상 학원을

나가서 현지인들과 대화해 보면 영어가 안 먹히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 영화를

자막 없이 보고, 미국인과 대화할 때도 술술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 학원에서는 더 배울 게 없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혼자 살게 되면 친구들과 집에서 술도 마실 수 있고, 여자 친구도 데려올 수도 있으며

공부도 편한 시간에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나가서 한 달만 하면 학원에서 두 달 하는 거

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는 소문이 학원에는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런데 내게는 학생들의 그런 생각이 공부가 하기 싫은 것에 대한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끔 학원 밖에서 졸업생들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다들 공부가 목적이라며

짐을 싸서 나갔던 친구들이었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친구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만난 졸업생들은 대부분 이성 때문에 학원밖에 사는 것 같았다. 필리핀의 젊은 처자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쉽게 정을 준다. 한국 학생들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즐기기가

좋으니 마다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스스로 절제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혼자 생활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수도자의 길과 버금갈 정도로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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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학원 계좌로 4개월치 수강료를 입금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고민을 빨리 종결하고 싶었다.

나는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 공부를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다.”

그리고 "공부는 선생님에게 배워야 한다” 이 생각이 내 판단의 근원이었다.


송금이 끝나자 마음이 무척 홀가분해졌다.

6개월 치 수강료를 미리 내고 수업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방학을 이용하기 때문에 3개월 일정도 빠듯하고 일반인은 6개월씩이나

돈벌이를 하지 않고 공부를 핑계로 빈둥거릴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기 때문이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가보자."

"끝에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가보자."

"가 봐야 뭐가 있는지 알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다 잡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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