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발음(發音, pronunciation)

"문법과 어휘는 발음보다 우선한다."

by 벼랑끝

#15. 발 음


50대 초반의 ‘제이알(J.R.)’이라는 신입생이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중년 신사였다.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으로 염색이 되어 있었고 멋진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흔치 않은 ‘롤링 타바코(말아 피우는 담배)’를 피우는 멋쟁이 신사였다.

입학식 때 짧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영어도 잘하는 것 같았다.


‘제이알’은 사업가였다. 1:8 수업시간에 본인의 직업을 ‘비즈니스 컨설턴트’라고 소개했다.

한국이나 외국 사업가들에게 각 나라의 수익성 있는 사업을 중간에서 연결시켜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무역회사나 종합상사 같은 거냐고 물어보니, 웃으며 주 업무는 상담자와 골프를

치는 거라고 했다. 돈을 잘 버는 것 같았다.


제이알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는 호주에 살았었고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어서 심심풀이로 ‘프랑스어’

공부를 했는데 프랑스어가 재밌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더니 3년쯤 지나 모 대학교 프랑스어과에

2학년으로 편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경로로 편입했는지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파리로 어학연수를 가서 1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불어고 영어고 다 잊어서 다시 공부를 해야 할 거 같아 세부로 어학연수를 왔단다.

영어는 사업상 많이 쓰지만 유창하지는 않아서 휴식 겸 공부 겸 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는 거짓말 같았다. 그는 영어고 프랑스어고 무지 유창하게 했다.


제이알은 내게 이것저것 묻는 걸 좋아했다. 술을 좋아했고 술과 함께 따르는 것들도 좋아했다.

처음엔 내 방에 자주 찾아와 세부와 학원 생활에 대한 조언을 많이 구했다. 아마도 비슷한 또래가

나 밖에 없어서였던 것 같다. 그는 초반에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1:8 수업을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제이알 그리고 프랭크 선생 이렇게 셋이 수업하는 일이 많았다.

다른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우리와 수업하는 게 무척 싫었던 것 같다. 멤버가 거의 이렇게 확정되자

다른 학생들은 거의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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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1:8 수업시간에 제이알이 발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말할 때 가끔 불어 발음이 나와서 프랭크가 놀리곤 했는데 제이알이 그런 발음을 하면

프랭크는 히스패닉 발음을 섞어서 답하곤 했다. 프랭크는 대학 때 스페인어를 부전공으로

배운 데다 뉴욕에 살 때 히스패닉 동네에 오래 살아서 스페인어를 꽤 잘했다. 미국의 히스패닉

동네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어느 날 제이알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해외에서 바이어들을 상대하다 보면 영어 발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현장에서 만나는 많은 해외바이어들은 영미권의 사람도 있지만 비 영미권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발음이 좋다 나쁘다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말은 누구도 꺼내지 않을뿐더러 꺼내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다.


스페인어 계통의 사람들은 스페인 발음이 섞인 영어를 쓰고,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은 프랑스

발음이 섞인 영어를 쓴다. 독일인은 당연히 독일 발음의 영어를 쓰고, 필리핀 사람은 필리핀

발음이 섞인 영어를 쓴다. 그들의 문자(라틴알파벳)가 비슷하다고 해서 발음마저 비슷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한국인이 한국어 발음으로 영어를 하는 것은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내가 팔고 싶은 물건)’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느냐,

상대의 비즈니스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상품(본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적절한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느냐,

상대가 나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도록 행동하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지 영어 발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독 한국 사람들만이 “쟤, 발음 이상해, 영어 못하는 거 같아” 같은 소리를 하는데, '발음'은 언어

활용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실질적 본질은 아니라 것이다.


하지만 발음 중에는 한국 사람도 쉽게 고칠 수 있는 영어 발음이 있는데 이것은 웬만하면 고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R’과 ‘L’을 구분하거나 ‘P’와 ‘F’, ‘B’와 ‘V’를 꼭 구분해야 할 것처럼

생각 하지만 그걸 제대로 구분해 내는 비 영미권의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건 선천성에 가까운 후천적 습득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발음이 없는 모국어를 쓰는 외국인에게 이런

발음이 쉬울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어려운 자음 발음보다는 차라리 모음에 더 많은 신경을 써서

발음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음과 단음의 구분 같은 것을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어의 경우는 장단음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영어의 경우는 장단음을

구분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다. 따라서 최소한의 장단음만 구분해 줘도 듣기가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장단음을 구분해서 올바른 문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자음 발음이 좀 어눌해도

원어민은 잘 알아듣는다고 했다.


우리가 원어민의 말을 들을 때 억양을 느끼는 것은 자음보다는 모음 때문인 경우가 더 많은데,

특히 ‘R’이 중간에 들어가 있으면 혀를 굴리는 자음으로 발음 하기보다는 장모음으로 처리하는 게

원어민은 더 쉽게 알아듣는다. 사전의 발음기호를 보면 [r]이 이탤릭체로 삐뚤게 표시된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자음보다는 장음으로 인식해서 발음하는 것이 실제로 말할 때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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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가 듣고 있더니 이런 말을 한다.


자기는 뉴욕에 20년을 살았지만 미국 사람처럼 발음하진 못한다. 그건 미국 살면서 굳이 발음을

바꿀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식 발음으로 영어를 하지 않아도 미국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음을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바른 어휘와 문법만 사용할 수 있다면 방송국

아나운서 될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스트레스받으며 발음을 바꾸나? 같은 언어를 많이 듣고 사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발음들이 있다. 발음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프랭크는 뉴욕에 살 때 되도록이면 좋은 영어를 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에서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20년을 근무했는데 전화로 첫 면접을 할 때 10분쯤 이야기를

잘하다가 상대가 대뜸 "너 영어 잘하냐?"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 지금까지 나하고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냐?"이렇게 대답했더니, 상대가 "아! 그렇지." 하더니 내일 출근해서

정식으로 인터뷰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 후 그 직장에서 20년을 다녔고 사장 가족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사장이 집도 마련해 줬고 그 집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봐줘서 나중에 아이들 대학 졸업식에도

갔다고 했다.


프랭크도 미국 사람들은 상대방이 어떤 발음으로 말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문법이 어긋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생활도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이 언어소통이 잘 안 되면 대도시에서는 밑바닥 생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솔직히 어느 나라든 안 그럴까.


그동안 나는 발음까지 신경 쓰면서 영어 공부를 할 틈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내가 이상한 발음을 하면 선생들이 고쳐주긴 하지만 발음이 수업의 중요 포인트는

아니었다.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발음에 신경이 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발음 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지만 신경은 쓰인다.


그럼에도 "문법과 어휘는 발음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으로 늘 공부했다. 수업이 끝나면 발음보다

문맥이 틀린 말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걱정의 포인트였다.


“학원 선생들은 한국인 발음에 익숙하니까 다 이해하지만 진짜 영미권 사람들은

우리처럼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라고 하는 학생들이 많다.


옳은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날 이후 이 말을 신뢰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어눌하게 말하는 외국인의 한국말을 다 알아듣는다.

그가 한국말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한다고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일로 사람을 무시한다면 그건 무시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건 영미권의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말은 올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노력하면 될 거 같다.

하지만 발음은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현재 내가 공부하는 방식은 "해서 되는 것을 열심히 한다."이다.

좀 기회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영어 공부에서도

"해서 되는 것과 해서 안 되는 것"을 구분해서 하려고 한다.


어릴 때 "하면 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만 살아보니 세상에는 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해도 안 되는 일은 분명히 있었다.


한국어 발음이 무척 좋은 외국인이 한국말로,


“나 집에 엄마 착륙했어요.”

“아빠 출항합니다. 학교로 지금”이라고 한다면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한국말을 잘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무슨 말인지 의미 파악은 되지만 결코 올바른 한국어는 아니다. 내가 말하는 영어가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늘 문장을 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르게 말하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최우선 목표이다.

그래서 지금은 발음보다는 올바른 어법으로 말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갈 수 있는 만큼 가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착오 없이 한 방에 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뒷 일은 뒤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내 방식대로 간다.

이러나저러나 후회는 남지 않겠는가 뒤 돌아보는 일은 뒤에 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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