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전의 허와 실

"외우는(memorize) 게 아니라 읽는(reading) 거"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14. 사전의 허와 실


첫 수업 들어갈 때는 무얼 준비해서 가야 하는지 정말 난감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준비해 간 것은 예전 고등학교 때 쓰던 영어사전, 콤팩트 한 싸구려 전자사전,

노트북 컴퓨터 이 정도였다. 영어사전이 아직 집에 있던 것도 신기했다.


복도에서 보니 책으로 된 영어사전을 들고 다니는 학생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처음부터 전자사전만 가지고 수업에 들어갔는데 이게 싸구려다 보니 사용이 너무 불편했다.

다른 학생들이 쓰는 최신형 전자사전이 너무 부러웠다. 전자사전이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 삶에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그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물건이었다. 한데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사전이 제일 아쉬웠다. 인터넷 사전이 아닌 좋은 전자사전이 같고 싶었다.


1:8 수업 담당인 프랭크 선생은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영어사전’을 읽는 것이었다.

그는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없을 때는 책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영어사전을 읽고

있었다. 한국 출판사에서 발행된 영영사전이었는데, 학생 중 누군가가 졸업하면서 주고 갔다고 한다.

왜 그걸 그렇게 보냐고 물으니, 재미있어서 본다고 했다.


명색이 영어 선생인데 학생들이 이상한 단어 가져와서 물어볼 때 모르면 창피하니 공부 겸 교양 겸 해서

읽는다는 것이다. 사전 읽는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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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8 수업시간에 학생이 한 명도 안 들어왔다. 프랭크는 학생들에게 정말 인기가 없다.

결국 나하고 프랭크 둘 만 수업을 했다. 수업 시작하고 할 말이 없어서 슬쩍 이런 말을 했다.


-나 : 나도 사전 구해서 읽어 볼까?

-프랭크 : 좋지.


할 말이 없어서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프랭크가 웃으면서 ‘좋다’고 한다.

내가 한국에는 사전 씹어 먹는 사람도 있다고 했더니.

눈을 치켜뜨며 “왓? 크레이지...”하면서 놀란다.

그러면서 그가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사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대화를 잠깐 요약해 보면 이렇다.


사전은 어쩔 수 없는 어학공부의 필수 아이템이다. 그렇지만 너무 맹신하지는 말라,

회화에 있어서 사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실제 회화에서는 명사를 제외하면

1:1 대응으로 꼭 맞는 단어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동사나 형용사의 경우는 특히

더 하다.


영어의 경우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형이 모두 존재하는 단어들이 많은데 이걸 따로

외우다 보면 외울 단어의 양이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품사에 따라 활용도도 무한히

많기 때문에 외워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구어체에서 변형되는 단어들은 외워서 알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이건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언어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발전하며 때론

죽기도 하기 때문에 그걸 1:1 대응으로 의미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까 사전을 외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또한 어려운 단어일수록 구어에서는

많이 쓰지 않는 단어이니 외울 필요가 없다. 영어로 소설이나 논문을 쓸게 아니라면

왜, 영어사전을 외우나? 회화, 특히 구어에서는 문장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고 몸에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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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어사전 만날 끼고 다니면서 읽느냐?”라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런다.

“야, 나는 외우는(memorize) 게 아니라 읽는(reading) 거잖아."

왠지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알듯 말듯한 감정에 빠졌다. "Memorize, Reading?"


프랭크 수업에는 다른 학생들이 오지 않는 일이 많아서 둘이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러다 이런 깊은 대화를 할 때면 이해를 못 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크도 나와 이야기할 때면 칠판에 써가면서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손짓 발짓해가며 날 이해시키려고 무척 노력했다.


넓은 교실에서 둘이서 목소리 쉬어가며 꼭 싸우듯이 대화하는 것이다. 1:8 교실은 넓다 보니 좁은

1:1 교실에서 하는 수업과는 많이 다르게 진행된다. 앉았다 일어섰다도 자주 하고, 책상에 앉기도

하고 왔다 갔다도 한다. 이런 식으로 프랭크와 2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날 밤 낮에 프랭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봤다.

내가 내린 결론은 대충 이런 거였다.


언어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갈리게 되는데 우리나라 교육과정에는 구어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구어체 단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문어체"와 "구어체"를

구분하지 못한다. 회화는 대표적인 "구어체"다. 한국의 영어교육은 문어체 중심이다. 그러니 실전에서

적용이 어렵다. 이건 한국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회화(말)를 잘하고 싶으면 구어체 문장과 구어체 단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한국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도 외국인 앞에서 입이 열지 못 하는 것은 '구어체' 단어들을 활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영어 원어민이 쓰는 현실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단어는 1:1 대응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외워서 그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고 프랭크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되면 영어로 생각하기가 시작될 것이고 입이 터질 것이라 했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단어 이야기할 때 프랭크가 했던 말이다. 프랭크는 시종일관 같은 이야기를 했던 거였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대화를 나 혼자 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대화를 했었는데 이제 내가 직접 프랭크와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대화의 내용보다 이 사실 자체가 더 뿌듯하다.


뭔가 한 걸음 지나온 느낌이다.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기는 한 것 같다.

가보자 가다 보면 끝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되겠지.

그 뒤에 일어날 일은 또 그 뒤에 생각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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