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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y 20. 2021

행군의 아침

여성들과 21세기 군인들은 이해 못 하는 예전 이야기...

내게는 잊히지 않는 숫자가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번호가 왜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꽤 지났음에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20년 넘게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13******로 시작하는 이 여덟 자리 숫자를 

오늘 아침 이를 닦다가 갑자기 떠올렸다. 

아마도 어젯밤 게시판에서 본 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또래의 남자들은 위 숫자를 보면 아마도 킥킥거리며 자신의 번호를

한 번쯤 떠올린다는 데 500원을 건다.


연식이 오래된 사람들은 알겠지만 13******으로 시작하는 여덟 자리 숫자는 예전

대한민국 육군의 군번이다. 찾아보니 1991년부터 학번처럼 연도를 앞 두 자리에

쓰는 군번체계로 바뀌었다는데, 그 이전에는 입대 순서에 따라 이렇게 여덟 자리로 

군번을 부여했다.


육군의 경우 '1'로 시작하는 군번이면 대충 어느 해에 군대를 갔는지 알 수 있고 

계급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신병교육대인 논산훈련소는 

꽤 오랫동안 '1'로 시작하는 군번을 사용했다. 다른 신병교육대의 군번은 어떻게 시작

되는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1’로 시작되는 군번은 대한민국 육군, 시쳇말로 ‘땅개’의 

대표 군번이다.


어젯밤 인터넷의 게시물을 보다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  https://www.ddanzi.com/free/675486443  )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좋은 이 강산 위해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


우~씨,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그 글의 게시판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행군을 안 해 본 사람들이 하는 말..

"그게 왜 힘드냐? 그냥 걷는 거 아냐?

배낭에 공기베개만 넣는다는데 그렇게 힘든가?"


ㅋㅋㅋㅋ... 한 번 해 보지...

행군 말미에 집(막사)이 보일 때쯤 터져 나오는 20대 남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대한민국 땅개(육군)에게

‘행군’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군대에 대한 기억이 그러 나쁘지 않다.

예전에는 형제가 많은 집은 군대를 순서대로 보내 학비 부담을 분할하곤 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형과 나는 순서를 맞춰서 군대를 갔다.

병무청 신체검사 마지막 무렵에 내 인생을 바꾼 군의관의 질문이 아직도 기억난다.  


군의관: “너 양쪽 눈 시력차이 많이 나는 거 알지?”  

멍청이: “네 압니다.”

군의관: “방위로 갈 수도 있겠는데?”

멍청이: (1초도 망설임 없이) “현역으로 가고 싶습니다.”


군의관은 약 3초 정도 빤히 날 쳐다보더니 ‘피식’ 웃고는 내게 가보라고 했다.

“신의 아들(면제)”이네, “장군의 아들(방위)”이네, “사람의 아들(현역)”이네 하는

말이 유행일 때 “장군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고 현역으로 가겠다고 

했으니 ‘피식’ 거린 것도 이해가 된다. 어쨌든 나는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무사히 

논산훈련소로 입대할 수 있었다. 


전방도 후방도 아닌 서울 북쪽의 어정쩡한 곳에서 근무를 해서인지 구타가 많은 

때였음에도 나는 그리 많이(?) 얻어맞지는 않았다. (적어도 곡괭이 자루나 야삽으로 

맞지는 않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방과 후방에서 하는 모든 훈련을 

다 소화해야 해서 군 생활이 매우 바빴다. (‘빡셌다’고는 하지 않겠다. 들어보면 나보다 

더한 사람이 훨씬 많더라.)


대충 기억나는 걸 적어 보면, 

일 년에 두 번씩 전술 훈련에 포함된 100킬로 행군을 했고, 전술훈련을 나가기 

전에는 2주간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진지보수공사를 했다. 각개전투, 혹한기 훈련 같은 

대한민국 육군들이 가장 싫어하는 훈련을 에프엠대로 소화했고, 혹서기 훈련에 포함된 

유격훈련은 알다시피 ‘군인’을 ‘땅개’로 만드는 지상훈련의 백미이다. 이것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받았다. 또한 방독면 구보도 쓸데없이 자주했다. 

아마도 ‘충정훈련(데모진압 훈련)’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전경들이 하는 ‘진압훈련’을 육군이면서도 

만날 해야 했고, ‘5분 대기조’도 몇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맡아서 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5분 대기조’에 걸리면 잘 때도 군화를 신고 자야 한다.

(물론 고참들은 요령을 부린다) 게다가 두 달 걸러하는 사격 대회와 주특기 

교육은 덤이었다. 


참고로, 내 주특기는 행군 때 가장 많이 낙오하는 81밀리 박격포였다.

한두 시간 포를 매고 가다 차량에 몰래 옮겨 싣긴 하지만 그 한두 시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지옥이었다. 다행인 건 당시 병장이던 고참들은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훈련’을 뛰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건 봤다. 심히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런 빡센(?) 군 생활을 했다고 해서 내가 군대에 대한 인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군대 덕에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체력단련이라는 것을 해 봤고,

한국에서는 평생 만져보지 못할 총과 칼을 지겹도록 가지고 놀았다. 지금은 찾을 수도

없지만 태권도 단증을 땄으니 나는 국기원에 등록되어 있는 블랙벨트 소유자이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 육군은 삽질, 낫질, 곡괭이질 같은 삶에 도움(?)이 되는 막일이 

일상이었다. 때문에 모자에 작대기 네 개를 달 즈음에는 삽 한 자루만 있으면 네 식구는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한 겨울에도 세재 없이 돼지기름 묻은 

식기를 설거지해내는 삶의 지혜도 터득했다. 혼자서 간단한 바느질을 할 수 있고, 

프로페셔널에 가깝게 다림질과 구두를 닦을 수 있다. 특히 아무리 많은 빨래도 빨랫비누와

양동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낼수 있다.  


이런 일을 겪어보면 인간은 마음만 먹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만용’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이게 다른 이들에게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는데, 나처럼 열등감 

많고 지질한 스타일의 인간에게는 삶에 큰 도움이 됐다. 


군 생활이 내게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해서 ‘의무복무’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비 인권적 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젊은 한 때를 견뎌 내는 이 제도를 나는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를 강제로 구속하는 ‘의무복무’는 내게 폭력으로

느껴진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모병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여건상 어쩔 수가 없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오늘 첫새벽에 눈을 떠 출근 준비를 하는데 군대 생활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그때가 떠올랐을까?

아마도 지금 내가 그때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하면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지나온 내 시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뭔가 세상을 잘못 살았던 게 아닐까?” 

“내가 현재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지나온 삶을 그다지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보면 비교의 대상에 낄 수 없을 정도로 극빈하지만

내가 그리 부실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솔직히 나는 재밌게 세상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즐겁게 세상을 살 생각이다. 


이런 걸 ‘정신승리’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던데 '정신승리’가 뭐가 나쁜가?

사는 데는 ‘정신병’ 보다는 ‘정신승리’가 훨씬 도움이 된다. ‘정신승리’가 부족해

우울증이 찾아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100킬로 행군 말미에 동이 터 올 무렵 부대가 보이기 시작하면 제일 앞에

걸어가던 중대장이 소리친다. “전방에 함성 5초간 발사!!”

그럼 젊은이 수백 명이 너나 할 거 없이 동시에 미친 듯이 함성(?) 아니 비명을 내지른다.

24시간 행군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비명(?)이 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비명에 가까운 함성은 ‘정신승리’의 끝판 왕만이 낼 수 있는 야수의 포효 같은 것이다.


그 비명 같은 함성과 함께 부대 정문을 통과할 때 불렀던 “행군의 아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장교들이 위병소 앞에 도열해서 일개 사병들에게 경례를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불렀던

군가 “행군의 아침”은 군번과 함께 영원히 잊지 못할 20대 내 정신승리의 기록이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난 20대의 삶을 그럭저럭 잘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의 나를 20년쯤 후의 내가 돌아볼 때 뭐라고 말하게 될까?

그럭저럭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주저앉지 않고 최선을 다해 뭔가를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금의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하얀 봄꽃을 자랑하던 나무들이 어느새 푸른 잎으로 색깔이 바뀌었다.

주말 출근길, 텅 빈 서울거리를 씩씩하게 걷는다.

‘행군의 아침’이다. 


존재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아직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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