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역(逆) 어학연수

여기서 안 되면 어디 가도 안 된다.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18.
역(逆) 어학연수


로비에 EOP(English Only Person) 표찰을 달고 있는 처음 보는 여학생이 나타났다.

스물네다섯 쯤 보이는 아주 예쁜 처자다. 처음 보는 학생이 EOP를 달고 있어서 유심히 보게 됐다.


-나 : 저 친구 누구야? 처음 보는데 EOP를 달고 있네?

-학생 : 지나(Gina)에요. 어제 처음 왔는데 첫날부터 EOP를 달고 있더라고요.

-나 : 영어 잘하나 보네.

-학생 : 잘하겠죠. 미국에서 왔는데.

-나 : 엥?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고?

-학생 : 네, 맞을 거예요. 작년에도 잠깐 여기 있었데요.

-나 : 신기한 일이네.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오다니.


필리핀은 대부분 어학연수의 환승역 정도로 생각한다.

영어에 자신이 없는 초보자들이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영국 등지로 떠나기 전에 기초를

닦기 위해서 잠깐 들르는 곳이란 뜻이다. 한국 유학원에서도 필리핀은 그런 식으로 추천한다.

유학원에 전화를 하면 대부분 “필리핀 연수 마치면 어느 나라로 가실 거예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나는 유학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선택해서 와서 잘 모르겠다. (※ 유학원: 사설 유학 알선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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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어학연수만 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은 영미권으로 떠난다.

그런데 학원에 있다 보면 ‘역(逆) 어학연수’를 오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루는 매니저와 함께 저녁 식사를 같이할 일이 있어 물어보니 대충 이렇게 설명한다.


-나 : 미국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애들도 있나 봐?

-매니저 : 모르셨어요? 지금도 학원에 다섯 명 정도 있어요.

형님은 학원에서 일어나는 일 정말 모르시네요.

-나 : 엥, 그렇게 많아? 왜 미국에서 여기로 온대?

-매니저 : 영미권의 어학연수 학원들은 비용도 비싸고 수업 방식도 다르잖아요.

거기서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특히, 기초 없는 애들은 힘들데요.

한국 돌아갈 날은 점점 다가오고 돈은 떨어지고 실력은 늘지 않고,

그러다 해결책이랍시고 찾은 게 필리핀인 거죠. 세부에 있다가 간 애들은

더 오고 싶어 한데요. 그쪽 어학원에서 필리핀 어학원이 좋다고 소문 듣고 오는 애들도 있고요.

-나 : 어렵게 집 떠나서 고생만 하고 다니네..


-매니저 : 공부하기 싫은 애들이 미국이든 필리핀이든 어디 간다고 외국어가 되겠어요?

꼭 그런 애들이 나라 탓하고 선생 탓해요. 그래도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애들은 나아요. 대부분 “어학연수 그거 아무 소용없어”이러면서 이도 저도

안 돼서 돌아가 게 대부분이죠.

-나 : 지나는 어때?

-매니저 : 지나 뭐요?

-나 : 영어 잘하냐고? 첫날부터 EOP를 달고 있잖아.

-매니저 : 지나는 원래 영어 잘했어요. 그래도 미국 학교에 입학하려니 힘들어서

다시 왔데요. 아마 전공 책도 가져왔을 걸요?

-나 : 그렇구나..


지나는 절대 한국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 말로는 수업 끝나고 식사를 하거나

학원 밖에서 회식할 때도 영어만 쓴다고 했다. 프랭크에게 물어보니 지나는 좋은 학생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지나가 전혀 한국말을 쓰지 않자 언제부턴가 학원에서는 ‘지나 한국말 시키기’ 게임이 시작됐다.

지나가 영어만 하는 것이 보기가 싫었던지 이 짓궂은 장난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내가 듣기로

지나는 아직은 그 장난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시간문제라고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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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나와 수업을 받을 일도 가깝게 지낼 일도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냈는데, 어느 밤 그녀와

생각지도 않은 대화를 나눌 일이 생겼다. 토요일 밤 불 꺼진 로비에서 지나가 혼자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한국에 통화를 하고 있는지 지나는 유창한(?) 한국말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어를 하는 지나의

모습을 본 최초의 목격자가 된 것이다.


-나 : 나 봤어, 한국말하는 거. 한국말할 줄 아네...ㅎㅎ

-지나 : (웃으며) 저 한국말 잘해요..

(전화는 끊었고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물론 한국말로)

-나 : 미국은 어땠어?

-지나 : 재밌죠. 공부만 안 하면...

-나 : 여기도 공부 안 하면 재밌어...

-지나 : 아저씨. 여기서 열심히 하면 미국 가서도 다 통해요. 물론 적응하는데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금방 익숙해져요. 근데 여기서 안 되면 거기 가면 더 안 돼요.

여기서 어느 정도 레벨 올려서 가면 정말 쉽게 적응할 거예요.


-나 : 그럴까?

-지나 : 미국에서 10년 살아도 영어 못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영어 안 쓰고도

충분히 살 수 있어서 그래요. 한인들하고만 교류하면 힘들게 공부할 이유가 없어요.


-지나 : 아저씨는 여기 끝나면 어디로 가세요?

-나 : 몰라, 계획이 있는 건 아냐?

-지나 : 어쨌든 열심히 하세요. 그럼 어디 가도 다 돼요.

-나 : 고마워...


아마도 학원 전체에서 지나와 한국말로 대화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을 것이다.

나는 지나가 한국말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나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게임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이 게임에서 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후에도 나는 지나가 한국말을 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아마도 게임에서 이기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을 수도 있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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