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에 빵! 터지기도 한다.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19. 토익 870의 힘..
1:4 수업이 재편성되면서 새로운 학우들이 생겼다.
이번에 새로 1:4 수업에 들어온 친구들은 맥스(Max)와 스캇(Scott) 그리고 마틴(Martin)이다.
모두 이번에 새로 입학한 친구들이라 실력도 모르고 얼굴도 생소하다. 선생은 ‘넬리아(Nellia)’
학원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여자 선생님이다.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자기소개부터 수업이 시작된다. 어디 살고, 어느 학교 다니고, 좋아하는
건 뭐고 등등. 사실 나는 첫 수업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이런 수업이 너무 익숙하다.
내 노트에는 첫 수업에 쓰는 표현들이 수도 없이 적혀 있다. 이렇다 보니 처음 나와 함께 수업을
하는 친구들은 내가 엄청 영어를 잘하는 줄 안다. 사실 하루만 지나면 들통날 실력이지만
어쨌든 첫날은 모두 날 우러러본다.
먼저 새 멤버들을 소개하겠다.
이 멤버들은 이후 내 학원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친구들이어서 첫인상을 꼭 기록에 남기고 싶다.
-멤버 1: 스캇(Scott), 37세
수업시간에 말을 거의 안 한다.
학원의 평균 연령을 올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영어든 한국어든 진짜 말을 안 한다.
술을 좋아한다.
-멤버 2: 마틴(Martin), 33세
한국에서 회화 학원을 6개월 정도 다녔다고 한다.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했으며 표정이 항상 밝고 명랑하다.
술을 좋아한다.
-멤버 3: 맥스(Max), 26세
대학교 4학년 휴학 중.
레벨 테스트에서 상당한 점수를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
아마도 영어 실력이 가장 뛰어 날 거 같은데 수업 중에 말이 없다.
술을 좋아한다.
-멤버 4: 넬리아(Nellia) 선생, 23세.
학원에서 평가는 높지 않지만 귀여운 걸로는 1등이다.
알다시피 예쁜 것과 귀여운 것은 좀 다르다.
술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남자 넷이 수업을 하니 당연히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방과 후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지만 그날은 어쩔 수 없이 멤버들 손에 끌려서 근처 맥주 집으로 갔다. 시끄러운 음악 때문에 말소리가 거의 안 들리는 공간에서 1차를 하고 근처 한국 편의점 노상 테이블에서
2차를 했다. 거기서 얼큰히 취한 남자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뭔가 사연이 있었다.
누군들 사연하나 없겠는가?
그날 가장 재밌는 이야기는 맥스의 사연이었다. 맥스는 대구에 살고 공대생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니 학우들이 전부 토익만 붙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도 "토익이 살길이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토익 책을 잡았고, 첫 번째 토익 시험을 쳤는데
점수 490점을 받은 것이다. 자신은 영어 좀 한다고 생각했는데 점수가 너무 안 나와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얼마 후 다시 시험을 쳤는데 점수는 그대로였다.
학과 관련 자격증은 웬만큼 땄는데 이놈의 토익이 점수가 안 나오니 취직이 어려울 거라는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졸업이 가까워 오자 조바심도 심해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학교를 휴학했단다.
이유는 "토익 유학".
부모님을 졸라서 서울 강남의 토익 학원에 등록을 하고 자기 말로는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자기 말로는 넉 달 동안 하루 4시간도 안 자고 죽어라 공부만 해서 드디어 4개월 후 870점을 찍게 됐다.
처음 목표가 800점이었는데 그걸 단 4개월 만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더란다. 서울의 학원 분위기가 900은 넘어야 어디 가서 ‘나 토익 좀 했네’
하면서 명함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두 달 만 더하면 900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때 대구에서 어머님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더 이상 돈 보내 줄 수 없으니 내려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서울 생활을 접고 대구로 내려갔는데 토익 900점이 계속 머리에 뱅뱅 돌더란다. 집에서 공부를 하니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만큼 공부가 안 되어 계속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결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고,
부모님도 다시 설득해서 웬만큼 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 다시 서울 가서 또 점수를 올리면 뭐하나, 이 돈으로 어디 가서 실컷 놀기나 하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한국에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서울로 토익 유학을 포기하고
어학연수를 택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꽤나 진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토익 800이나 900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나는 모른다.
맥스 말로는 죽도록 공부해서 얻은 점수라고 했다. 그리고 900에 대한 묘한 집착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수업을 해 보니 토익 점수와 관계없이 말하기가 안 된다는 것이다.
교재 난이도도 우습고 말도 다 들리는데 수업에 참여가 안 된다고 했다. 자기는 어학연수 와서 놀면서
쉽게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영어 스트레스가 또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익 870점짜리 학생에게 내가 한 마디 해 줬다.
“야! 좀 지나면 괜찮아져, 처음엔 다 그래. 걱정 마!”
우리는 팀워크가 좋았다. 나 빼고는 모두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특히 멤버들이 나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해 줬다. 사실 스캇은 한국어 책 읽는 것보다 영어 책 읽는 게 더
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의 실력이어서 나 빼고는 다들 그럭저럭 하는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피자 주문하기’나 ‘바가지 쓰고 산 물건 환불하기’ 같은 현실 게임에서부터,
‘이혼’, ‘인종’, ‘테러’, "문화 차이" 같은 관련된 심도 깊은 주제에 대한 토론도 많이 했다.
넬리아 선생은 수업을 교재로 이끌지 않고 일상 대화에서 많이 찾았다. 이렇게 하니 학생들이 그때그때
시사 이슈나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 같은 어려운 주제를 스스로 준비해 오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엘리아 선생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수업 조율을 잘했다.
수업 중에 나와 맥스가 가장 말이 없었다. 물론 끼어들어서 한 마디씩 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은 생각을
제대로 말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맥스는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길게 이어 가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맥스는 말하기 전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날이 왔다.
평소와 같은 1:4 엘리아 수업 시간, 그날 대화의 주제는 건축물이었다.
유명한 건축가 이야기에서부터 한국에는 집 짓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며, 아파트가 얼마나 있고,
높은 건물은 뭐가 있으며, 너는 거기 가봤네 안 가봤네, 이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63 빌딩에
관한 이야기를 맥스가 꺼냈다. 그 건물을 짓는데 들었던 비용이며 뒷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는데 말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때 넬리 아가 물었다.
-넬리아 : 맥스, 전공이 뭐야?
-맥스 : 토목이요.
-넬리아 : 아하, 그래서 건물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구나?
-맥스 : 한국 고궁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까?
-넬리아 : 아무거나...
이렇게 시작된 맥스의 이야기는 장장 2시간 가까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한국의 토목 건축물과 건축 상식 그리고 세계 각 나라의 건축물에 대해서 맞는지 틀리는지 모를 썰을
풀었고 모든 질문에 답변을 했다. 누구도 그의 말을 끊으려 하지 않았고 끊을 이유도 없었다.
맥스는 그날 말을 끊으면 그걸 10배로 갚아 주겠다는 듯이 미친 듯이 말을 뿜어냈다.
우리는 미친듯한 팀워크로 맥스를 서포트했고 그날 맥스는 드디어 전설 같은 일을 성공시켰다.
바로 "빵 터진" 것이다.
나는 그날 대화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봤다. 한 번에 “빵 터지는 것”을...
토익 870점 맥스가 세부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3주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 밤 스캇이 내방 문을 두드렸다. 축하주를 마시러 가잔다.
오늘은 무조건 마셔야 한다면서 손을 잡아끈다. 스캇은 술 마시러 세부에 온 사람 같다.
우리는 시끄러운 맥주 집에서 1차를 하고 지난번처럼 한국 슈퍼 앞에서 또 2차를 했다.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서 맥스에게 물었다.
-마틴 : 너, 뭐냐? 어제까지 그렇게 조용하더니만.
-맥스 : 몰라요. 전공 이야기가 나오니까 말이 술술 나오던데요. 틀리게 말하지 않았나 몰라.
-나 : 나는 모르지.
-마틴 : 나도 몰라.
-스캇 : 넬리 아가 가만있었으면 된 거야.
거하게 취한 상태로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니 프랭크 선생이 한 말이 생각났다.
“스피킹이 제일 쉽다.”
그리고 이런 말도 생각났다.
“가끔 빵 터지는 사람도 있다."
빵 터지는 현상이 언제 일어나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건 기본이 있는 사람이 뭔가에 자극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젠장!! 나와는.......
(끝)